부활 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2025. 4. 26. 오전 9: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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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교회에서 서로에게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그럼 용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실 그렇게 쉽게 풀릴 문제는 아닙니다. 아직 감정이 남았기 때문이죠. 그 감정은 피해자나 가해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감정해소가 덜된 상태에서 시도하면 무리가 따르겠지요. 하지만 이런 질문을 드려봅니다. 그 기간은 언제까지여야 할까요?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요? 아니면 누가 죽어야 가능할까요?’ 본당들마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하지만 교우들끼리 얽힌 문제로 인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힘든 문제들을 만납니다. 이런 때 교우들은 이런 말을 하지요. 그 사람 진짜 쓰실 꺼에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문제를 저질렀는지 모르시죠?’ 그랬을겁니다. 많은 문제를 일으켰겠지요. 그래서 아직 아물지 않았고요.

 여기서 2007년 한국영화인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란 영화를 소개할까 합니다배우 전도연이 신애라는 역할로 나오면서 그녀는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밀양으로 내려갑니다. 새 출발을 하려고요. 상처받았기에 남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으려 남들에게 잘 보이려 괜찮은 척, 넉넉한 척하며 삽니다. 흔히 주위에서 볼 법한 평범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그녀가 잘 산다는 소문이 돌면서 아들이 유괴되고 결국 시신으로 돌아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그녀의 눈에 우연찮케 보인 건 개신교 부흥회였습니다. 그 안에서 통곡하며 쏟아내지요. 그러다 슬픔이 안정되었는지, 그녀는 교인들에게 아들을 죽인 살해범을 만나겠다고 교도소로 향합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 말씀처럼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여겼지요. 그런데 유괴범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저도 여기서 믿음을 갖게 되었어요. 하느님이 죄 많은 절 용서해주셨습니다. 눈물로 회개했기에 저는 용서받았습니다.’ 이 말을 듣자 그녀는 속이 뒤집어집니다. 죄책감에서 해방된 모습을 하는 그가 이해되지 않고 하느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사실 그녀는 이번에도 남들에게 보이려 그런 만남을 시도한 것이지요. 그 이후 하느님과 대적하려는 시도가 펼쳐집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그는 정말로 용서받은 것일까요? 하느님의 용서는 그런 것인가요?

 들어보신 구절이 있지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땅에서 풀리지 않았는데 하늘이 풀렸을까요?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데 과연 가해자가 용서받았을까요? 사과할 줄 모르는 세상을 살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괜히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뭐가 있느냐?부터 사과하지 않고 버티면 된다는 부류까지, 요새는 순서와 방법을 잘못 아는 이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럼 주님의 용서는 어떤 순서였을까요?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뉘우치고요. 피해받은 이에게 다가가 용서를 구합니다. 잃었던 아들의 비유나, 고해성사의 순서가 그렇지요. 잘못을 저지른 아들이 아버지께 다가갔습니다. 그럴 때 용서는 시작되지요. 하지만 지금의 사회방식처럼 아무 것도 안하고 미적대는 이들이 있다면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네요. 그 시간이란 게 과연 여러분의 편일까요?’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다행히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그러면서 다시금 관계를 회복하고요. 주님도 과거를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갔으니까요. 하지만 용서받은 그는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토마스도 순교라는 주님의 길을 따릅니다. 영화 밀양은 지역 이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깊숙한 밀(), 볕 양()처럼 비밀스런 햇볕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빛의 무엇이 비밀스러울까요? 햇볕속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데서 따왔답니다. 앞서 유괴범이 하느님이 자신을 용서하셨다는 자위하는 방식의 용서는, 감독이 일부러 만든 의도입니다. 그런 값싼 방식으로 왜곡시킨 용서는, 참다운 용서가 아니라는 것을 고발합니다. 그만큼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요. 자신을 죽이는 차원이 필요합니다. 비록 고통이 따르지만 그렇게 밝혀진 빛은 보이지 않지만 모두를 따사롭게 비춥니다. 더 이상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자유롭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배반한 제자를 품을 수 있었던 건, 모든 것을 이긴 부활을 살고 계셨기 때문인데요. 우리도 그래야겠지요? 남들 시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따사로운 빛을 내는 자비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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