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같은 날, 서로에게 복을 받으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지요? 내가 원하는 복은 무엇이고, 정작 하느님이 주실 복은 어떤 것일까요? 여기서 불편하지만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와 하느님은 다르니까요. 그동안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좋은 게 좋은거야~’ 라고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사랑을 베푸시지만 여기엔 정의와 공정이라는 파이프 라인을 통해 부어넣으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의도이지요.
그에 반해 많은 분들이 원하는 복이란, 내가 원하는 방식의 복입니다. 대단히 현실적입니다. 사업이 잘 되고, 돈 많이 벌고, 가족들 건강하고... 이런 것을 누가 무어라 반박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라면 다들 원하는 지극히 본능적인 차원인데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요.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오늘도 미사에 참례했는데요. 그 너머의 차원을 만나려고요. 그 너머의 차원의 예를 들지요. 우리가 장례식장, 혹은 미사 때, 그리고 추석이나 오늘 같은 설 명절에 왜 향을 피울까요? 연기가 가득하고, 숨도 못 쉴 지경이라 문을 열어놔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요. 우리나라의 장례나 제사 방식은 향을 피우며 시신이 내는 악취를 피하기 위함이 있고요. 혼령을 부르려고 그리합니다. 하지만 미사 때 향을 피우는 이유란 하느님은 사람이 올리는 방식의 제물은 받지 않습니다. 다른 방식이 필요합니다. 구약에 보면 사람은 동물을 바치지만, 하느님은 그걸 받지 않으시고 대신 제사를 올리는 마음인 기도와 희생, 공경을 받으시기에 여기서 발생되는 분향의 풍성한 연기를 통해 우리 마음을 받아주시길 기원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은 영원함이 주어지진 않았지요.
2독서에는 마치 연기 같은 짧은 삶을 사는 우리가 결국 누구를 통해 복을 받을 수 있냐?를 말해주고요. 복음에는 갑작스런 도둑에 대비하듯, 갑작스런 죽음에 모두 처할 수 있기에 준비한 깨어있는 종들은 그 죽음을 의연히 맞이할 것이겠고요. 1독서는 받는 복의 유효기간을 잘 늘이려면 정작 무엇이 필요할까?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지요. 잠시 왔다가는 세상입니다. 이제 향을 피우게 됩니다. 조상님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삶을 잘 보존하며 갈 때가 다가왔을 때, 잘 받아들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