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주간 화요일
오늘 악령이 들린 사람이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런 말이 그리 당혹스럽게 들리지 않습니다. ‘니가 뭔데 나에게 참견이냐?’ 라는 생각과 말을 평상시 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당 활동을 하면서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건 예수님이니까, 하시는 것이지, 나는 그런 거 할 수 없다’ 라며 바로 단정을 내려버립니다. ‘너는 너, 나는 나’ 의 태도는 마치 합리적이고 구분을 잘 짓는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기기에 나에게 좀 불리하면 바로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요?
상대방과 나를 분리시킬 때, 서로가 하나가 아닌, 단절되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이 있지요. “네 이웃을내 몸 같이 사랑하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웃은 남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고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연결은 간섭과 참견이 아닌, 서로의 도움이 되고, 보충이 되며, 연결이 된다는 말과 이어집니다.예전 어린이 이야기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눈, 코, 입이 떠들다가 위장은 아무 것도 안하면서 먹기만 하는 것에 불만이 가득하자 다들 먹지 말자고 합니다. 그러다 눈이 안 보이고, 환청이 들리는 등 문제가 생기자, 다시금 위장에 먹을 것을 줬다는 이야기지요. 다들 연결되었다는 건데요. 독서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요.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하느님이 일부러 기억해주시고, 돌봐주신다... 는 뜻이 뭘까요? 그만큼 관계를 맺으시는 주님을 보여주시는데요.
우린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관심을 귀찮아했었습니다. ‘잔소리 많은 꼰대’ 라고 여겼구요. 간섭을 사랑이라고 여겨지않았습니다. 하지만 지나보니 그분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린 그분을 그리워한다는 현실을 느끼게 됩니다. 어쩌면 이런 것은 어릴 때부터 깨우쳐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예전 새끼 원숭이를 가지고 실험한 적이 있지요. 한쪽에는 젖병을 철사에 매달아 놓고, 다른 편은 따스한 담요를 놓았습니다. 그러자 새끼 원숭이는 배고파 잠시 젖병에서 우유를 먹다가, 빨리 담요로 돌아와 한참 파묻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먹이보다 관심이란 것이죠. 이렇듯 어릴 때 받은 사랑이 아이의 성장에 영향력을 끼치듯이, 선한 영인 하느님을 배제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악에 기울어진다는 것을 잘 파악하신다면 구분짓고 멀리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