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팔일 축제 내 제6일. 요한1서 2,12-17; 루카 2,36-40
예전 정약용 선생은 배우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3가지로 정리합니다. 하나는 지혜요, 둘째는 부지런함, 셋째는 침묵입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혜롭지 않으면 굳센 것을 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힘을 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요하지 않으면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각과목에 대한 과목공부는 했지만 ‘과연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는 학문 접근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성적은 좋았어도 배운 과목이 나의 인생과 연관성을 찾지 못했기에 공부는 그저 해치우고 성적 올리는 수준으로 전락합니다. 연관성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어릴 때 이런 자세를 알려줬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드는데요. 이런 자세는 서양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중세 토미즘을 연구한 앙토냉 질베르 신부님은 공부하는 자세에 대해 ‘자신을 계발하려면 통찰력과 꾸준한 방법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하는 삶은 금욕과 의무를 지켜야 하며 그 노력을 통해 끈기를 가져야만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진리는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시험하면서 인내를 가져야 한다. 경솔한 사람만이 야망과 명예에 눈이 멀어 진리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장하준 교수의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보면, 선진국은 자기들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 온갖 규제를 풀면서 보호정책을 통해 성장하지만 정작 자기들이 사다리에 오르면 다른 개발 도상국가들은 개발을 못하게 사다리를 치워버렸다고 씁니다. 그들은 저개발국가와 같이 살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들보다 똑똑하고 지혜로우면, 자기들이 세운 것이 무너질까 그렇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더 불안하고, 스스로를 무능력하게 여기도록 놔둡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살 수 있다고 여기니까요.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안 가르쳐주지요. 그럼 교회는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은 공존하길 원치 않지만 교회는 독서에서 “내가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이라고 6번이나 언급한 이유는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 입니다. 그 법칙을 알려주려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모르는 이들은 남들처럼 세상에 들어가 한몫 잡다가 오히려 오염되는데요. 법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한나는 과부로 여든 네 살의 할머니처럼만 보였지만, 그녀는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참 지혜를 가진 이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참다운 자세를 가지면서 주님이 말씀하신 참다운 법칙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