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주일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다들 핸드폰을 붙잡고들 있습니다. 쇼츠 영상부터 만화, 드라마 등을 보곤 하지요. 하지만 그런 동영상보다 세상은 우리보고 책을 많이 읽으랍니다. 독서에 관한 중요성을 어릴 때부터 교육시켰지요. 그런데 대체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율법에 대한 중요성, 그리고 복음의 메시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주소를 보지요. 성경이 경전이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 많은 이들이 중요성을 잘 모릅니다. 동네 중고책방을 가면 성경책이 뭉쳐 쌓여있는 것을 봅니다. 이들이 성경을 팔아버린 이유가 뭘까요? 그저 두꺼운 책이겠고요. 실생활에 도움이 안되고요. 스토리를 다 안다고 여기겠지요. 그게 전부일까요?
조선 정조 시절 유학자인 홍석주는 책읽기의 다섯 등급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인 5단계는 유담파적(遊談破寂). 소설 읽기랍니다. 한가하게 소일하며 시간 보내기에 좋다면서요. 그보다 높은 단계인 4단계는 계물흡문(稽物洽聞). 고증 훈고서 읽기입니다. 책을 조금 읽고서 얕은 지식으로 남에게 과시하는 것인데요. 거기 담긴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합니다. 3단계로 수사미관(修辭美觀). 문장을 닦아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것입니다. 책을 쓰거나 책을 읽고 세상에 자신의 느낌을 띄우지요. 요새 책 읽고 리뷰나 SNS에 올리는 것처럼요. 그다음 2단계는 경세치용(經世致用). 옛것을 널리 알아서 지금 처한 문제 적용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1단계의 최고봉은 명도정덕(明道正德). 경전을 읽고 이치를 명확하게 밝혀 맑게하는 단계랍니다. 독서를 할 때에도 재미삼아 읽는 것보다 경전을 읽으면서 자기를 수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요. 그렇다면 경전이 왜 중요할까요?
여기서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만 실제로 복받고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건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많은 민족이 있지만, 자기들이 말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글로 담을 수 없는 민족이 많은데 우린 다행스럽게도 우리 글이 있지요. 여기서 궁금한 것이 생깁니다. 세종대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한글의 원리를 설명한 해례본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한문으로 써놨기에 이를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을 세조 때 써냅니다. 그런데 총 30종 가운데 21종이 불교경전이었습니다. 경전 외에는 용비어천가와 의학서적이었습니다. 유교 국가에서 대체 왜 그랬을까요? 유교 주요 경전인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 번역은 백년이나 지난 1588년에야 이뤄졌으니까요. 여기서 학자들이 말하길 몇 가지 이유가 있답니다. 조선이 유교국가이긴 하지만 당시 백성의 신심은 불교였고요. 불교 경전은 계속 중요도를 띄었습니다. 그래서 글 모르는 대중의 확산을 위해 택했다는 주장입니다. 한자로 된 경전은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에 읽는 방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었는데요. 물론 신라, 고려시대 때부터 사찰에서는 이두, 구결, 향찰이란 차용법을 통해 조금이라도 해석을 잘하려 했었지만 한계는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경전이 한자로 되었기에 제한된 사람만 사용할 수 있었고요. 대중은 그걸 알아듣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예전 교회에서 라틴어만 썼던 시절, 대중이 성경을 읽기 어려워서 성화나 성물, 조각상, 유리화를 통해 일반인에게 성경의 메시지를 대신 전했는데 그런 점에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종교를 대중화 시킨 중요한 도구였는데요. 그 덕분에 우리도 성경을 내 눈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경전. 카논(CANON)은 처음에는 ‘갈대’라는 뜻이었답니다. 갈대를 가지고 당시 사람들이 물건을 측정하는 자 같은 역할을 하면서 ‘정밀, 정확함’이라는 뜻으로 확장되었고요. 점차 건물을 지을 때 금 긋는 ‘직선을 측정하는 줄’이라는 용어로 쓰이며 인간 사회의 행위 규범, 원칙, 표준이란 의미가 되었는데요.여러 사람들이 긴 시간 동안 참다움을 알리려고 그리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경전을 가벼이 여길 수 없는데요. 삶의 척도가 되니까요.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헌법이 훼손되는 시국에서, 한편 신앙의 바탕과 근간이 되는 성경에 대한 중요성도 같이 희석되는 것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이것을 교회가 중요하다니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동안 수 천년을 버티게 해준 인간 삶의 틀이 되어준 것이 뭐였을까요? 이것을 일부러 망가뜨리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뭘까요? 이전 것에 대한 단순한 반발 심리일까요? 아니면 너무 오래되었기에 신화 같다고 여겨서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놓치는 것이 있지요. 경전은 연애편지와 같습니다. 상대이성이 호감을 보이는데 못 알아듣는다면 어찌될까요? 하느님이 나를 좋아하는 사인을 보내시는데 못 알아보면 어찌되나요? 사랑하는 상대방의 시선을 짚어내지 못하면 못 알아들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글자를 넘어선 의식의 확장이 필요하고요. 경전을 통해 절대자를 만나면서 비로소 가치의 이해가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꾸준히 가까이 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