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여러분은 무엇을 할 때 큰 기쁨을 얻었다고 여기시나요? 어릴 때는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모든 것을 신기해 하며 ‘엄마 이게 뭐야?’ 라며 묻는 질문이 많았고요. 하나하나 배워가고 얻어가면서 삶에서 성장을 해나갔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요즘 사람들은 그런 것을 얻으며 느끼는 짜릿함이 별로 안 보입니다. 인터넷만 두드리면 검색을 통해 금방 알 수 있고요. 요즘 같은 김장 시즌에 예전에는 배추를 소금물에 절이고, 미리 고추를 볕에 말렸다가 방앗간에 빻고 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절인 배추와 고춧가루를 사다가 마련해 놓은 속으로 버무리면 됩니다. 쉽게 편하게 얻어지니 심드렁한 기분이 들 수 있습니다. 안해볼 땐 남들이 먼저 하던 게 부럽기도 했지만 그런 걸 해보고 맛보니 이내 그 재미가 반감됩니다. 어쩌면 믿음의 종교도 그렇지 않나요? 예전에는 도망다니며 사람들 눈을 피해 종교생활을 했던 것이 이제 믿는다고 잡아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교리도 여러 통로를 통해 쉽게 들을 수 있고요. 예전보다 분명 편해진 면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니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주님의 영역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쉽게 얻어지지 않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기에 어려워서 거리를 두고 피하기도 하지만 아십니까? 그것이 진정한 시작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라는 것을요.
사람에겐 흥미로운 구석이 있습니다. 삶이 편안할 때는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굴곡을 겪고, 애환을 맛보고, 절망에 빠지면서 반대로 희망을 맛보기도 하는데요. 막심 고리키라는 러시아 작가의 희곡 ‘밑바닥에서’ 란 작품이 있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위기가 극심한 때에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의 인생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하나같이 패배자의 모습들입니다. 성매매하는 여성, 사기꾼, 도둑질 하는 이, 지위와 부를 잃은 남작, 폐렴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방치하는 남편 등이죠. 여기에 루카라는 부랑자가 나타나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떠나지만 남은 이들은 격론의 토론이 벌어집니다. 과연 그의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면서요. 물론 진실이 항상 옳아 보이지도 않고, 거짓이 당장에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은 진실입니다. 여기에 아픈 지점이 있습니다. 밑바닥에 사는 사람에게 희망이란 마치 날 선 칼날 같다는 것을요. 그것이 우리를 베어버릴 수도 있는데요. 하지만 절망과 희망이 오가며 삶의 굳은살이 베기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분명 주님의 말씀은 “받아 삼키니 달지만 먹고나니 배가 아플 만큼”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삶에서 그런 케이스를 몇 번 계속 만나며 우리가 더 나아지길 바라십니다. 체칠리아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주님이 주신 은총이라는 맛의 환희를 맛봤기 때문인데요. 쓰디 쓴 현실에서 나는 그분을 떠올리며 이겨나갈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