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여러분에게 있어 ‘가난한 사람이란 누구’ 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고요. 어떤 사람은 내가 아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일 수 있고요. 또 누구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막연한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오늘 교황님이 언급한 가난한 이들이란 그런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과연 그들이 누구일지 미사를 통해 잘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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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에 앞서 ‘여러분에게 가난한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라고 여쭤봤습니다. 그렇습니다. 점점 어려워지는 살림살이에 나 자신부터 막연한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만이 전부이진 않지요. 4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쓰신 세 번째 회칙 ‘모든 형제들’ 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꿈과 희망이 부숴져 버렸다. 인간관과 세계관은 심각한 왜곡을 일으켰고 인간은 편리한 대로 이용하다가 용도를 다하면 버려도 되는 물건이 됐다. 세계가 경쟁의 무대가 되었고, 경쟁 자체가 세계화와 진보를 이뤘지만 슬프게도 인류를 안내할 지도가 없다. 지혜가 없는 정보의 홍수가 한 몫을 더한다’ 면서 오늘날 문화는 일종의 해체주의를 걷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 삶에 적용시켜 보지요. 종교나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 사회 문화적인 모든 전반에 대해서 말이지요. 교황님은 말합니다. ‘저는 언젠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조언한 적이 있습니다. 역사를 무시하라고, 조상들의 체험을 배척하고, 과거를 가볍게 보고, 자신이 가리키는 미래만 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말대로 움직이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젊은이들을 피상적이고, 근본없고, 회의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모든 다른 것들을 해체시키고 없애버려 반대 세력없이 군림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문화 식민주의의 새로운 형태입니다. 고유한 전통을 저버리고 모방의 열광, 선동된 폭력, 용서할 수 없는 무관심으로 자기네 민족혼을 빼앗겨 버려도 용인하는 민족들은 마침내 사상적 경제적 정치적 독립성마저 상실합니다. 역사의식, 비판적 사고 등을 공허하게 만들거나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자유 정의 등의 단어가 조작되고 변형되어 어떤 행위도 정당화 하기 위해 사용될 수 없는 의미없는 공허한 상투어가 되어버립니다’ .. 제가 왜 이런 말씀을 꺼냈을까요? 우리가 알고있고 배운 것들을 무너뜨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부터 가난한 사람들에겐 탈출구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신문고가 있었고요. 우리 종교는 신앙을 통해 구원을 제시하고요. 개인적인 어려움을 지켜보던 이웃들이 남몰래 도와주는 시스템이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상은 어떻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실망하게끔 이끕니다. ‘니가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고 말하며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 불안을 가지고 돈을 벌고, 자기 말만 듣게끔 만드는 가스라이팅과 세력이 생깁니다. 점점 더 잔인해져 갑니다. 일본에서 60년 이상 장기 집권하는 집권당 자민당이 있습니다. 장기집권이 가능한 이유가 뭘까요? 첫째로 일본 속담에 이런 게 있답니다. ‘강한 권력에는 대들지 않고 따르는 게 이득이다’ 이미 강자에게 꼬리내리고 반항하지 않고 숙이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치는 자기들 자민당에게 맡기고, 개인들은 그저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무언의 압박을 가합니다. 이것을 우리나라 정치가들도 따라합니다. 국민은 그저 가만히 있으라고요. 요새 뉴스 안 보는 분들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관심이 오히려 정치가가 원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국민을 무지하게 만드는 것, 시끄럽기에 국민은 무관심하게 살라는 태도는 실제 그들이 원하는 방법입니다. 둘째로 일본에는 상호대립을 하다가 언제 배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부정 당할까봐 아무 것도 못한답니다. 여기에 우리나라는 분열의 사회를 겪습니다. 상대방을 인정하기보다 폄하하고 억지를 부립니다. 이것이 한편 단체를 활발하게 움직이지만 잘못된 결정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이들이 있고요. 그런 세력을 키워갑니다. 자기 말만 듣는 이들을 따로 챙기고, 남들을 음해하며, 회개할 수 있는 기회,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마치 주홍글씨처럼 박아놓고 이미 재판이 끝난 인간으로 치부합니다. 자~ 누가 가난한 이들입니까? 억울한 취급을 받는 이들만이 아니지요. 그렇게 치부해버리는 사람들 또한 더 가난하고 더 불쌍한 사람인데요. 문제는 그들 자신이 불쌍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기도를 합니다. "주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지금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 지 모릅니다." 그들은 지금 잘하고 있다고 여기며 주님을 죽입니다. 헌데 모르는 행동을 한다고요? 니콜라스 마아스의 그림 '어린이를 축복하시는 그리스도' 에 보면 축복받는 아이가 어딜 보고 있나요? 네. 예수님을 보지 않습니다. 대단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이들은 주의력이 떨어지니까요. 받는 은총이 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럼에도 주시지요.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내 말을 들으라면서 교회 안에도 그런 세력이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기도하기보다 자기 일에 빠지게끔 종용하고요. 이웃의 어려움을 살피기보다는 자기 욕심에 몰두하게끔 만들고요. 주님의 가르침보다 세상이 주는 맛을 추종하라고 몰고 갑니다. 배운 가르침을 부정하게 만들면서요. 과연 누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일까요?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실제 가난한 사람들은 가까이 있어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너무 가까워서지요. 가까워서 험한 말도 오가고, 금전적인 것에 여러 피해를 가하거나 입혔습니다. 아직 덜 여물은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때를 아셨지만 우린 아직 모르기에 하고 싶은 것에 몰두합니다. 우린 다들 멀쩡하게 보이지만 실은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가난함을 가지고 서로를 가련하게 대해줄 때, 마치 동병상련의 마음 자세가 나오면서 상대방을 제대로 봐줄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