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칭찬받길 원하는 사람, 반대받길 원하는 사람, 이 둘 중 손들라고 하면 다들 칭찬받길 원할 겁니다. 여기에 더 들어가 봅니다. 내가 소명껏 옳은 일을 하고 있는데도 미움을 받고 있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관두시겠습니까? 여기엔 대중심리, 군중심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칭찬한다고 꼭 옳은 일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채소를 많이 먹고, 흰쌀밥보다 잡곡을 드시고요. 고기를 먹더라도 굽지말고 삶아서 기름기를 빼고요. 오래 씹고, 맛있는 걸 절제하라’ 고요. 좋아라만 할까요? ‘몸에 좋은 건 알겠는데, 맛없다’ 고 안하려 들 겁니다. 요새 젊은층에게서 암 환자가 많이 발생합니다. 의료기기 수준이 발전되어서이기도 하지만 배달음식의 달고, 짜고, 매운 음식이 늘었고요. 기존 식당도 여기에 편승합니다. 지금 동양인, 한국인의 DNA는 5천년간 계속 적응한 결과입니다. 김치도 18세기까지 빨갛지 않았습니다. 고추가 그때 들어왔지요. 즉 잠깐 입맛의 유행으로 체질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대 데레사 성녀도 그러했습니다. 당시 갈멜은 봉쇄수도원이 아니었습니다. 면회와 출입이 너무 자유분방했습니다. 이에 수도원의 본 정신을 잃었다고 느끼면서 십자가의 성요한과 개혁을 단행합니다. 사람들이 좋아라 했을까요? 당연히 반대가 심했습니다. 반대가 심하니 그 다음 어떻게 했을까요? 사람들 말 들어주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아닌 걸 아니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 속 마음이 보이고 그 자세가 사람을 살리는데요. 예수님이 3번의 수난예고를 하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다 반대합니다. 이때 만약 예수님이 오늘날 민주적 방식에 손을 들어주면서 ‘너희가 싫어하니 하지 않으마’ 했다면 오늘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구약을 봐서 알지만 당시 예언자를 다 죽여버렸습니다. 옳은 소리 한다고요. 이에 구세주인 예수님이 직접 손보시려 합니다. 개혁은 꼭 안하던 것을 바꾸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원래 정신으로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대 데레사도 수도원, 수도자가 결국 세상보다 주님께 집중하는 삶이라는 의도를 갖고 임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바리사이를 꾸짖으시지요.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그러기에 그럴싸하게 살면 안되겠습니다. 빛과 소금의 비유처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길에 버려져 사람들 발에 밟힐 뿐이다는 말씀처럼 내가 지금 뭘 하는 지부터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