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7주간 화요일. 갈라 1,13-24; 루카 10,38-42
우린 내 말 잘 듣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일단 시킨데로 잘해주니 좋아하지요. 하지만 주님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마냥 모범생만을 부르진 않았습니다. 성인들을 한 번 보십시오. 아우구스티노, 이냐시오, 샤를르 푸코 같은 방황하던 젊은이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해매긴 했지만 제대로 들을 줄은 알았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이었기에 대단히 논리적인 철학자인데요. 그의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는 발칙한 제목입니다만 이 책은 이미 많은 신자와, 비신자들도 읽었고요. 이것을 읽었다고 신앙을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진 신앙을 견고하게 했는데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철학자의 글을 읽을까요? 잠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종교의 기반은 두려움이다. 미지의 공포이기도 하고, 곤경이 빠져있을 때 나의 편이 되어줄 큰 형님이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모든 것의 기초다. 신비에 대한 두려움, 패배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은 잔인함의 어버이다. 이제 과학으로 사물을 어느 정도 이해했고 정복했다. 이제 더 이상 가상의 후원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고, 여기 땅에서 자신의 힘에 의지해 우리가 살기 적합한 곳을 만들자.’ 그러면서 우리의 할 일을 소개합니다.
‘우리 자신의 발로 세상을 공명정대하고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세상의 선한 구석, 악한 구석, 아름다움과 추한 것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진 말자. 우린 굳건히 서서 이 세계를 진솔히 직시해야 한다. 있는 힘을 다해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라는 것만큼은 되지 않아도 적어도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죽어버린 과거만 돌아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의 지성이 창조할 미래가 죽은 과거를 훨씬 능가할 것임을 믿는다. 우린 무엇을 믿는 사람들일까요?
그는 인간끼리 모인 종교는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비판을 가했고요. 무비판적으로 빠지면 진정한 신앙인이 못된다면서 최선을 다하자고 격려합니다. 우리도 가끔 대중심리로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따르는 것에 생각없이 따르곤 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온 바오로도 유대교의 바리사이로 예수님 믿는 이들을 잡으러 다닌 사람입니다만 그는 자신 안에 갇히진 않았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릴 제대로 들을 줄 알았습니다. 복음의 마리아도 예수님의 말씀을 귀여겨 듣습니다. 행동을 잘하려면 먼저 잘 들어야 하겠지요. 여러분도 그러하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