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2024. 9. 21. 오후 12: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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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학생 시절 국어를 배울 때 이거 배워서 어디에 써 먹어요?’ 하는 문법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역설법입니다. 영어로 패러독스(paradox)라고 칭하는 이것은, 언뜻 보면 모순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같지만 그 속에는 강한 진실을 담아내는 표현방법인데요. 우리가 잘 아는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 그 예가 나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님은 갔다라는 문장과 님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은 서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실제 이 뜻은 이러하지요. 나는 임과 이별했지만 나는 임을 잊지 않고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이내 다시 만날 것이라는 재회의 믿음을 바라고 있습니다. 왜 이런 표현을 쓸까요? 살다보면 그 방법으로만 표현될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형국에서,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닌 지점에서, 그 중간 지점에 놓인 내가 어떤 표현을 해야만 할 때, 완성형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애매모호한 표현이지만 오히려 미래를 그릴 수 있는데요. 여러분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십니까?

 1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당장은 형벌을 받고 있으니 크게 잘못한 사람처럼 여길 수 있으나 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뒤이어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받을 보상을 말씀합니다. 복음에도 나오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당장 힘든 것만 보는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오늘날 사람들은 현상의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눈앞의 것에 연연합니다. 이런 이들이 삶의 곤란에 빠지면 그때부터 정지 상태에 놓입니다. 멘붕입니다. 남들도, 나도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기에 혼란에 빠집니다. 사람은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허나 단순한 사실만을 따르는 이들은 거기서 모든 게 끝납니다. 왜냐고요?방향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가치있는 것이 사라졌다고 느낄 때 그들은 어쩔 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럽의 위기는 길을 잃은 합리주의에 그 근원이 있다합리주의가 뭐가 문제인가요? 합리주의는 객관주의를 말합니다. 객관적인 태도는 주관성을 희생시키고 오직 객관성만을 추구합니다. 이는 인간이 살아야 할 방향을 알려주기보다 수학의 물리학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했습니다.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트문트 후설은 철학, 수학, 물리학, 천문학을 공부하며 수 개념에서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랬던 그도 과학만능주의에 빠진 인간의 마음을 근원에서부터 다시 찾으려 들었습니다. 그가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성이 변질되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잔인하고도 이기적으로 말입니다. 그게 선험적 현상학입니다. 인식을 형성하는 궁극의 원천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합니다. 인간은 뭔가를 바라볼 때 그것만 보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도 바라봅니다. 결국 바라보는 대상과 대상을 둘러싼 여러 가지를 바라보기에 생각을 넓히는 지평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나름 연관성을 띱니다. 만약 우리가 고향집을 떠올리면 집 주변 풍경도 같이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그것을 단절시키는 순간, 그것만 보려드는 순간, 바라보는 대상이 뭔지 헤아리지 못하게 됩니다. 마치 나 혼자만 바라보면, 부모님도 안 보이고, 형제도 떠올려지지 않고, 하느님도 알 수 없다고 여기듯이 말이지요. 왜냐고요? 어설픈 합리주의는 참된 객관성을 찾기보다 자기가 보고픈 것에만 매몰된 것이기 때문인데요. 죽을 때까지 현상을 공부했다는 후설마저 결국 의미의 근원을 찾으려 했다는 점이 재밌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오늘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며 그분들의 삶과 죽음을 봅니다. 그분들은 무엇 때문에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염두했기에 신앙을 지켰을까요? 아마도 그 너머의 것을 봤을 것입니다. 비록 물리적으로 만나진 못했지만,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한계에 놓여있기에 그들은 몸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해냈습니다. 영화스토리는 우리 윤리와 다르지만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라는 작품의 명대사가 있지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이것도 역설적 표현이지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될 억압된 아가씨를 탈출시켜 주는 하녀를 만나면서 그녀는 자유를 얻습니다. 예상된 현실은 망쳐졌지만 오히려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준 사람을 만나면서요. 어쩌면 김대건 신부님과 여러 순교자도 예수님 때문에 본인의 인생이 망쳐졌다고 볼 수 있겠으나 실은 그들의 영혼을 구하셨다는 차원에서 역설적이게도 망쳤지만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게 되는데요. 우리는 무엇에 갇혀있나요? 현실을 넘어서는 무엇을 만나려 합니까? 남겨진 시간 속에서 선택을 잘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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