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대다수가 편안함을 얻으려 교회에 옵니다. 워낙 밖의 삶이 힘드니까요. 마치 갑자기 내리는 폭우나 땡볕을 피하려고 남의 집 처마에 잠시 모인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비가 그치고, 햇볕이 잦아들면 다시 자기 갈 길을 갑니다. 이는 세례받은 이들도 그렇습니다. 종교심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입니다. 이용만 한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 번 그런 신세를 져본 이들 중에 ‘여긴 뭐하는 곳인가?’ 궁금해하며 내가 할 일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단체나 봉사를 통해 교회와 주님을 위해 뭔가를 드리고, 나름 사는 맛도 찾습니다. 이제 더 나아가 내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가르침이란 것을 알면서 이용하고, 사는 맛을 찾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꿔나가는 삶으로 변화시키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이득만을 챙기는 삶의 한계를 본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에 언급된 이들이 그런 마음을 계속 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 시대에서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용기는 두려움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올바른 것이라면 물, 불 가리지 않는 투신의 자세로 만들어집니다. 솔직히 왜 안 두렵겠습니까? ‘계속 이러다가는 내가 힘들겠구나’를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받은 사랑 컸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장기에 ‘부모의 사랑’을 잘 받은 이들은 남에게도 베풀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는 이들과 엮인 삶을 살아온 이들은 큰 사랑을 하기 힘듭니다. 물론 못 받았어도 베푸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름의 체험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입니다. ‘나는 얼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는가?’ 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여전히 주저하는 건 그런 사랑을 받지 못했거나, 체험하지 못했거나 그저 내 일신상의 안위만 따지느라 용기가 없어 그런 것인데요. 요한 세례자의 ‘옳은 말’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야 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