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0주일

2024. 8. 17. 오전 10:2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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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0주일. 잠언 9,1-6; 에페 5,15-20; 요한 6,51-58

 나 자신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체력이 중요하겠지만 그 체력을 움직이는 방향타가 더 중요한데요. 그럼 지식일까요? 하지만 많이 배웠지만 가진 지식을 정리할 만한 뭔가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럼 지혜요? 오늘 독서에 지혜가 나오긴 하지요. 그럼 지혜의 주인은 누굴까요?

 예전 사막의 교부인 안토니우스에게 어떤 이가 물어봅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자신의 처지가 더 나아지길 바라면서 묻습니다. 그러자 고린토219절의 내용인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느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형제 자신의 의로움을 신뢰하지 말고 지나간 일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혀와 배를 다스리십시오 라고 말해줍니다. 여기서 몇 가지 따져봅니다. 지나간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은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는 거겠구요. 혀와 배를 다스리라는 말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라는 뜻입니다. 그럼 자신의 의로움을 신뢰하지 말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사람이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 게 아냐?’ 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게 숨겨져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도 자기를 들여다보면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학식 있고 능력을 자신해도, 여전히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잘못된 자신의 신뢰는, 진실을 보지 못하게 눈과 귀를 가립니다. 사람의 본능 자체가 그렇습니다. 원래 보고 싶은 데로, 듣고 싶은 데로 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멀어져도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하고 싶은 데로 하는 본능에 휩싸였기 때문이지요. 그럼 뭐가 문제가 될까요? 자기 자신에게 도취됩니다. 진리를 봐도 참된 것을 알아볼 줄 모르기에 어리석게 되는데요. 여기에 무엇이 필요할까요 

사람이 갑자기 강한 햇볕이나, 무대의 강렬한 조명을 받으면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걸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론이라고 합니다. 강한 조명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기에 순간 눈먼 사람처럼 됩니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빛이 이것보다는 밝지 않기에 나는 이럴 수 밖에 없구나 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하지만 그 빛을 받아들이고 적응될 때, 나는 지혜란 참된 진리를 만드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지혜나 진리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지요. 우리 능력 밖의 일입니다. 나 스스로 가진 약점과 한계가 워낙 많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인간 내면의 빛을 비추시는 참된 분을 만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나의 약함을 보았으니 당연히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보다 더 뛰어나고 완전한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을 넘어선 상황을 만났다면 나는 자연스레 무릎을 꿇게 됩니다. 여기에 주님도 우리가 그것을 만나길 바라시기에 초대하십니다. 1독서의 어리석은 이는 누구나 이리로 들어와라 는 말씀이 그것이지요. 하지만 대부분 재능이 그러하듯, 관리하지 못하면 잃을 수 있습니다. 유명한 솔로몬 왕이 그 예입니다. 그는 지혜가 넘쳐났다고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건 아니었지요.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달라 했을 때, 하느님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서 네가 장수를 청하지도, 부를 청하지지 않고,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너에게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는 엄청난 지혜의 선물을 받지만 그 역시 다른 나라와의 결혼정책으로 이방인 신을 섬기면서 가졌던 지혜로움이 흐려집니다. 즉 관리가 소홀했던 셈이지요.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성 안셀무스는 믿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고 말하면서, “나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해는 믿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무한한 존재는 내가 늘 인식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주도권, 이니셔티브(initiative)가 내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당신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길 바랄 뿐입니다.’ 라는 자세가 될 때 우린 그분의 지혜의 샘물을 어느 정도 받아 마실 수 있는데요. 다행히 우리에겐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양식인 성체가 있습니다. 주님을 맛보며 음미하며 이렇게 해보십시오. 간혹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하고, 힘들 때 잠시 있던 자리를 벗어나 이렇게 속삭여보십시오. ‘주님 제가 여기 있으니 들어와 주십시오라고요. 이는 그분을 초대하면서 충만해지는 시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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