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8주간 수요일
예수님 마음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요? 무엇이 있기에 홀로 기적을 베풀 수 있는 분이 오늘 복음처럼 굳이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을 힘들게 하실까요? 또는 홀로 하실 수 있는 분이 믿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해서 “기적을 많이 베푸실 수 없었다” 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을까요? 여기서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끌어내시는 것 같습니까? 솔직히 말해 신이 무엇이 아쉽겠습니까? 다만 당신은 우리가 함께 하시길 바라십니다. 올림픽 경기처럼 단식으로 홀로 할 수도 있지만 단체전을 통해 함께 하면서 얻는 기쁨이 있습니다. 마치 서로가 손을 잡는 것처럼 같이 강을 건너고, 산을 타면 기쁩니다. 부모-자녀간에도 이런 것이 보입니다. 자녀가 이미 성장을 했더라도 엄마는 자녀와 뭔가 함께 하길 바랍니다. 헌데 컸다고 부모와 별로 대화조차 하지 않으면 섭섭하지요. 불완전한 인간과 생명을 주신 분의 조화와 협력은 가끔 경이로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은 경탄합니다. ‘주님 제가 과연 이것을 해냈습니까?’ 너무 놀라 본인 스스로도 정리가 잘 안되는데요.
여기에 이런 해석을 하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전례’ 하면 되게 엄숙하고 진지하게만 봅니다. 절을 언제하고, 몇 번을 하고, 언제 등장하고, 퇴장하고 등등요. 그러나 전례는 ‘주님과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요. 노는 것을 그냥 애들 장난처럼 여겨선 곤란합니다. 곤지곤지, 잼잼을 하며 아이는 운동을 합니다. 손가락을 재빨리 움직이는 반응력을 키웁니다. 땅따먹기 술래잡기 등을 하며 아이는 정해진 규칙하에서 사회성을 길러줍니다. 이처럼 주님과 사람 사이의 청원과 수락은 서로의 위치와 격을 알려줍니다. ‘부모-자녀간 친구 같다’ 는 말이 언뜻 사이좋게 보이지만 그로인해 서로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넘는 경우가 있고요. 가끔 부모에게 폭력을 가하는 등 사고가 생깁니다. 서로 지켜야 할 위치가 있는데요. 주님을 향한 믿음이 하느님을 움직이게 하는 과정을 보니 얼마나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그분을 참되게 신뢰하면서 우리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분의 고마움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