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7주일

2024. 7. 26. 오후 10: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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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17주일

 여러분은 하나의 사안을 어느 깊이까지 보시는지요? 물밑,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봐야 진정한 것이 보이는데요. 오늘 말씀은 빵을 배불리 먹게 된 사건입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이 사건을 빵 5개로 5천명을 먹였다는 사건으로만 알아듣는다면, 복음의 의도를 한참 못 알아듣는 것이구요. 오히려 마술처럼 여길 겁니다. 우린 무엇을 살펴야 할까요? 빵이 그냥 많아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1독서는 어떤 사람이 맏물로 만든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서 가져옵니다. 복음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가져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들 자기 것이 중요하다고 꿍쳐놓고 안 내놓는 현실에서 그들은 좀 다르게 행동했음을 봐야 하는데요. 그래야 지금 세상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아는데요.

 오늘날 현실을 살펴보지요.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스펙을 과시해야 하고요. 자신이 옳다는 것을 과장되게 강조해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무한대로 자신을 노출하며 과시할 때, 비로소 안도감과 함께, 자신의 자아 존중감을 찾는 나르시시즘은 도처에 생겨납니다 이를 조장하고 퍼지고, 서로 격려하는 문화로 자리 잡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르키소스가 물웅덩이에 비친 자기를 보고 반했다는 자기애적 사랑은 예전에 왕자병, 공주병 정도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셀카, 갑질, 허세 등의 새로운 형태를 띠며 우리의 삶 깊숙이 파고듭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기도취, 자기 과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형태로 나타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의 겉모습 뒤에 숨어, 이젠 하느님의 영광이 아닌, 인간의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합니다. 이른바 내가 남과 만나면서 그 사람을 이용하려 듭니다. 이제 어른이 된 이상, 옛날 어릴 때 친구가 아닌 이상, 그냥 만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반성의 기회를 숙제로 남겨줍니다. 어릴 때 했던 그냥 해주는 것은 이제 거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영적 세속성과 관련된 방식을 경고하시며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펠라지우스주의에 주의점을 말씀합니다. 이 이단은 이미 4세기 경부터 시작되었지만 계속 생겨나는데요. 게다가 집마다 아이가 하나나 둘 밖에 없는 귀하게 자란 세대가 늘어납니다. 펠라지우스주의는 자신의 힘만 궁극적으로 믿으며,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남은 그저 나의 인생을 위한 보조자로만 여기게 됩니다. 이건 부부생활, 가정생활에도 적용되어서 서로를 협력자로 여기지 않고, 그사람은 나를 돋보이게 해주는 도구로 여기고서 내 말 잘 듣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부부건, 부모 자녀간이건, 친구나 동료건 간에 상관없습니다. 여기에 누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때부터는 충고로 듣지 않고 대적하게 됩니다. 외부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거나, 현실 자아와 이상 자아가 일치되지 않을 때, 타인과 비교하여 뒤떨어질 때, 성공과 실패에 대한 압박에서 실패한다고 느낄 때, 외부 피드백에 과민하게 반응할 때, 높은 기대에 비해 실제 미치지 못해서 갈등을 느낄 때,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은 쉽게 수치심을 가집니다. 이러한 수치심으로 인해 분노(anger)와 적대감(hostility)을 가지고 공격행동(aggression)을 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 감정과 행동의 앞글자를 따서 ‘AHA! 증후군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무엇을 살펴야 할까요?

 거룩하게 되는 길은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 걸어야 합니다. 교황님은 성덕은 다른 이들과 나란히 함께하는 공동체 여정에서 성장한다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는 중에 겪는 고난과 굴욕을 겸손한 자세로 이겨내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교회에 주시는 성덕은 당신 아드님의 굴욕(십자가 수난)을 통해 왔습니다. “굴욕 없이는 어떠한 겸손도, 어떠한 성덕도 없다고 이릅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다른 이들을 칭찬하고, 남들이 달가워하지 않은 일을 선택하는 게, 모두 일상의 굴욕을 견디며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모습이었는데요.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으며, 그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있었음을 안다면,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놓을 때, 함께 살 수 있음이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일제시대 때, 6,25전쟁 중에 사정 안 좋은 세상에서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대책 없게도 아이를 낳았기에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는데요. 그런 분들을 어리석다고 생각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후세인들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줬잖습니까? 헌데 우린 이런 시대에 미래를 생각한다고 아예 낳지 않는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생각없어보이는 그들이 내놓으면서 결국 모두를 변화시켰잖습니까? 여러분은 서로가 함께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내놓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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