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6주일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다들 성공해 떼돈 벌고 싶으니까요. 반면 실패하는 방법은 듣기 싫어합니다. 그 사람처럼 내가 망할까 싶어서지요. 하지만 그 사람이라고 망하고 싶었겠습니까? 저는 많은 분들을 만납니다. 그러면서 생각하지요. ‘왜 저렇게 됐을까?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렇습니다. 저는 성공하는 방법은 모릅니다. 하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압니다. 교적 인원 1120명 가량, 주일미사 참여자 430명을 책임지다 보니 늘 해야하는 것이 분별과 판단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성공하시나요?
저는 투자 분야에는 문외한이지만 이런 심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액을 운용해 주식을 투자하는 개개인을 ‘개미’ 라고 일컫지요. 어원적으로 개인(個人)의 ‘개’ 라는 음절을 따왔다는 이야기부터, 주가에 변동을 줄 만큼 영향력이 개미만큼 작아서 그렇게 표현한다는데요. 그럼 이들이 왜 실패를 하게 될까요? ① 일단 기본적인 베이스가 부족합니다. 종목분석, 회사 재무재표도 보지 않고 투자합니다.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면서 돈을 던집니다. ② 잘 모르기에 모든 뉴스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소문에 현혹되고요. 감정적으로 판단하여 집착하거나 때를 놓쳐 손해를 봅니다. ③ 남들 성공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빨리 대박을 노리니 조급해집니다. ④ 애초부터 기관이나 외국인 정보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규모와 시스템에서 필패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제가 신성한 교회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성당도 재정을 관리해야 합니다. 계획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빚 있는 본당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게 어디 경제적인 이야기 뿐이겠습니까? 좋은 신앙이 유지되고, 이른바 먼 길을 돌아가지 않으려면, 먼저 구조적인 차원을 이해해야 하는데요.
오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배에서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나름 애를 쓰고 노력하며 사는 이들인데 당신 눈에 무엇이 부족해 보였을까요? 앞서 개개인의 투자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우분들 생각에 목자 없는 양이 되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앞서 분석한 것과 비슷합니다. ① 해석의 틀안에서 초월적인 자세를 잃어버리고 경제적인 해석에 갇혔습니다. 당장의 것만 벌면 됩니다. 그러다보니 가진 해석의 틀이 한정적이라 뭘 해야할지, 돈이 생겨도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를 ‘단편화된 이데올로기’ 라고 칭합니다. 연령대, 성별, 관념 등이 개인적 관점과 유행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대학교 시험마저 교수님 강의 잘 녹음했다가 그대로 베껴 쓴 사람이 A학점을 받는 현실입니다. ② 삶의 다른 분야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종교와 삶을 분리시킵니다. 하느님과 닮았고 자연과 살아야 하는 내가 디지털처럼 기계처럼 행동하다보니 진리의 파편을 붙잡고 다 가진 것처럼 굽니다. ③ 내적 생활이 빈곤합니다. 내가 가진 영혼에 대해 관심없으니 붙잡고 있던 것을 잃으면 그때부터 허해집니다. 직장도, 학교, 식구와 돈도 잃을 수 있는데 그게 전부라 여기다가 잃으면 그때부터 속 빈 강정이 됩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뭘 가르쳐주셨을까요? 그분의 교육원리는 이러합니다. 1. 사랑의 원리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셨습니다. 2. 가능성의 원리입니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들이 아니었지요. 우리라면 채용인사 때 처음부터 낙방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변화시키시지요. 3. 본보기를 보이십니다. 발을 씻어주시고요. 기도를 어찌하는 지 알려주시고요. 십자가라는 희생을 통해 모범을 보이십니다. 4. 인격적인 만남을 보이십니다. 먼저 다가가서 치유하십니다. 멀찍이 물러서서 내게 뭘 해줄 것인가?기다리며 계산적으로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5. 깨달음의 원리입니다. 지시, 주입식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깨닫게끔 기다리고 도와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오늘은 농민주일입니다. 농부는 매일 수확할 밭의 농작물과 가축을 보면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러면서 예전 했던 방식에서 변하는 기후를 봅니다. 그러면서 변화를 시도합니다. 접붙이기 등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변화에 대처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사랑 어린 주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세상을 보신 방식을 떠올리며 더 나은 길을 가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