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5주간 목요일
민주주의 법치국가를 살면서 요사이 그 한계를 만나곤 합니다. 정의와 평화를 바라지만 실제 그것이 이뤄진다는 것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는데요. ‘법꾸라지’ 라는 요새 용어가 생겨났듯이 미꾸라지처럼 법망에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여깁니다. 마치 음주운전을 해도 잠시 그 자리를 피했다가 돌아오면 음주측정이 안된다는 사태를 악이용 하듯이 마찬가지로 법을 아는 이들이 오히려 법이라는 글자에만 메이면, 진정 해결을 하지 못합니다. 계속 이렇게 해야 할까요? 피해자는 늘어가고 책임지는 이는 없는데요.
오늘 독서에 “당신의 판결들이 이 땅에 미치면 누리의 주민들이 정의를 배우겠기 때문입니다.” 라고 나오면서 복음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하십니다. 여기서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요?
사회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화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범위를 갖지 않습니다. 이곳은 세상을 만든 분의 영역입니다. 전 세계, 전 우주적 차원이고 죽음 너머의 것도 하느님 영역입니다. 여기에 ‘이 지방, 나라는 이곳 통치자 관할이니 상관하지 마세요’ 라는 발언이나 생각은 대단히 유치한 발상입니다. 여기에 교황님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저는 오늘날 사람들이 과거와 달리 교회의 문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금세 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밝히는 것은 세상은 단순한 관리만으로 충분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복음화 사명을 수행하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법 규정만 위반하지 않으면 되나요? 법의 정신이란 것도 있습니다. 18세기 프랑스의 몽테스키외를 통해 입법, 사법, 행정이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한쪽으로 쏠리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지요. 원래 권력층은 자기 말 듣게끔 만드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경고하지만 이것도 지금 잘 안 지켜지지요.
여기에 필요한 것은 주님의 정신입니다. 복음화의 사명을 아는 이들은 실재를 중시합니다. 단순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부르심을 듣고 따르며 상대방을 돕습니다. 말로만 하지 않지요. 행동으로 옮깁니다. 여기에 꼼수란 없지요. 예로부터 교회정신은 이랬습니다. 시대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가르침인 정의와 평화를 주님을 통해 만나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