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0주간 금요일. 에제 37,1-14; 마태 22,34-40
간혹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우리 교우들의 삶이 재미없고 기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하고요. 재미를 보고자 하지만 다른 곳에서 흥미를 찾습니다. 실제로 그런 것을 본인들도 알면서 여기서 벗어나지 않고 불평, 남의 탓, 세상 탓을 하면서 결국 메말라 버리는 형국을 봅니다. 여기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나는 내 생각 안에 갇혀 있는 것을 편안하다고 여긴다’ 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은 ‘신비의 신앙’입니다. 일부러 뒤집어서 말했습니다. 원래는 신앙의 신비여~라고 들었지요? 언제 나옵니까? 빵이 성체가 되고, 물이 포도주가 되었음에 신비라고 외칩니다. 신비는 뻔한 것이 아니지요. 평소 감추어진 것이고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 그게 느껴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래서 성 토마스의 찬미가를 보더라도 ‘두 가지 형상 안에 분명히 계시오나 우러러 뵈올수록 전혀 알 길 없삽기에 제 마음은 오직 믿을 뿐이옵니다.’처럼 그냥 봐선 모르기에 믿음이 전제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도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자세일 때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게 됩니다. 이는 개인적인 무능함이 아니라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이라는 고백입니다. 헌데 우린 보통 자기식으로 판단하지요.
오늘 복음 시작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사두가이들이 부활이 없다면서 예수님께 다가왔지요. 여기에 주님은 ‘산 이들을 위해서도 죽은 이들을 위해서도 계신 것이라는 하느님의 의도’를 보여주십니다. 이번 레지오 훈화 때 어린 사무엘과 엘리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사무엘이 부르심을 받고 스승 엘리 집안이 망한다는 소리를 들었고요. 엘리도 하느님이 사무엘에게 뭔가 말씀하신 것을 알고서 ‘하느님이 무어라 하시더나?’ 라고 물었을 때 여러분이 사무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라고 묻자 대다수가 ‘말 못하지요’ 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세는 서로를 위해 도움이 안되지요. 결국 실토하고 엘리도 듣자 하느님의 의도를 파악하며 시인합니다. 비록 자기 믿음이 예전같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의도를 알 때 편안해졌는데요. 메마를수록 기도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