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주일
바쁜 현실이지만 가끔 가만히 있는 시간이 생깁니다. 이때 여러분을 무엇을 하시는지요? 핸드폰을 본다고요? 뉴스를 본다고요?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는 시간은 자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이지만 현실은 자꾸 뭔가를 하려듭니다. 여기서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는 방황한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 자꾸만 떠납니다. 꼭 먼 곳에 가야 떠나는 것은 아니지요. 현실과 다른 그 무언가를 만나고픈 욕구가 나를 자꾸 부추킵니다. 물론 이것이 꼭 안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방황한다는 말은 좋은 표현으로 ‘답을 찾아 떠나는 여행’ 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마치 젊을 때 그래 보셨잖습니까? 일탈, 가출, 부모의 말에 어깃장을 내는 행동 등은 어른으로 커가는 과정 중에서 벌어지는 행동입니다. 아이의 세상에서 자라던 내가, 거기서 머물지 않고 더 큰 어른의 세상을 알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가 얻고픈 답을 잘 찾아가고 계시는지요?
1독서는 어린 사무엘이 스승인 엘리 밑에 있었지만 하느님 목소리를 처음 듣는 현장입니다. 잠결에 자꾸 일어나 “저를 부르셨지요?” 라고 묻는 질문은 아직 초자연적인 그분을 몰랐기에 벌어진 현상입니다. 그렇게 벌어진 시작은 사무엘을 새롭게 이끕니다. 그저 문하생이었던 그가 엘리를 넘어서는 예언자로서 성장하는 시작이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몰랐었지만 나를 이끄시는 분을 만나면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갑니다. 오늘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보통 선생이라면 쉽지 않은 행동입니다. 자기 제자들을 계속 자기 품에 두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보라고 하니까요. 마치 어미 새의 마음일까요? ‘나는 여기까지이다. 이제 너는 더 큰 분을 만나야 한다’ 고 인계하는 모습 같습니다. 그 제자들은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자 당신은 말씀합니다. “무엇을 찾느냐?” 그들은 요한과 있었지만 한편으로 또 다른 뭔가를 갈구했었기에 예수님을 만나봅니다. 그리고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그러면서 뭔가를 느꼈기에 자기 형에게도 그분을 권합니다. 여기서 이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은 함께 나눌 때, 맛있고요. 즐겁습니다. 나만 한다면 기쁨이 배가되지 않으니까요. 여러분은 나의 신앙을 어떻게 느끼셨는가?를 답할 때,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넘어서는 것을 말이지요. 그러면서 2독서는 “몸은 불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륜은 단순히 성적(性的)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몸이란 뭔가 답을 찾을 수 있는 도구요, 열쇠입니다. 내 몸과 정신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서 좋은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평소 내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지 봐야만 내가 누군지를 아는데요.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평소 쓰는 시간과 돈은 어디로 흐르고 있습니까? 보통은 나의 만족과 욕구를 채우는 데 쓰지만 그것을 해보신 분들은 압니다. 또 다른 만족꺼릴 찾고 있는 나를요. 그럼 아까의 만족은 무엇이었나요? 일회성이었습니까? 아니면 흥밋거리였나요? 그들은 새로운 만남을 통해 자신이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생애 동안 지켜냈습니다.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회는 다가오다가 내가 느끼지 못해 그냥 날아가 버립니다. 여러분은 현재 어떻습니까? 아직도 방황을 하시나요? 아니면 명확한 답을 찾으셨습니까? 잘 되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