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3주간 월요일.

2023. 11. 20. 오전 12: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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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33주간 월요일. 마카상 1,10-64; 루카 18,35-43

 살면서 겪는 고민과 갈등에 이런 것이 있지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양보할 것인가?’ 라고요. 여기에 우리의 종교는 다른 가치관과 다른 점을 지닙니다. 이른바 타협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는 임금이 되면서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르는 칙령을 내리며 율법과 멀어집니다. 여기에 민족들이 갈라지면서 주님의 계약을 지키려는 이들과 멀어지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혼란하지요. 이것을 보며 한 나라의 지도자의 행실이 중요하다는 걸 보는데요.

나약함은 어진 것처럼 보이고, 잔인함은 의로움과 혼동된다. 욕심 사나운 것은 성실함과 헷갈리고 망녕됨은 곧음과 비슷하다 18세기 영정조 시대에 서얼 출신이지만 일본 통신사로 역임하고 문장가로서 출중한 성대중 이란 이의 글인데요. 부드러운 사람을 원한답니다. 자기들 말 잘 들어준다면서요. 그런데 그 사람의 속 터지는 물러터짐을 알까요? 원칙과 정의를 부르짖는 이를 원한답니다. 세상을 바꿔줄 것 같아서요. 그런데 그 사람이 가진 잔인함은 알고 있을까요? ‘국민에 대한 봉사칭하며 자기가 성실한 능력자라 말하지만 결국 자리만 탐했던 것임을 알아차린다면, 능력도 안되는 이를 강직한 이라고 알아봤다면 이런 착시가 또 어딨겠습니까?

 여기에 복음에 나온 예리코의 소경의 울부짖음이 떠오릅니다. 그는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눈을 뜨게 해주시는 이 장면에서 다른 복음에 나온 장면이 겹쳐 보입니다. 요한복음 9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잘남으로 주님을 못 알아보는 센스를 가지게 되었고요. 오히려 평범하고 못난 사람으로 일컫는 이들이 주님을 따르는 역설을 봅니다. 난 잘 보며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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