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1주일. 말라 1,14-10; 1테살 2,7-13; 마태 23,1-12
여러분은 지금 시행되는 법 질서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범죄를 저지르고 법정에 서게 되자 남자는 변호사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제발 벌금형으로 끝나게 해주세요." 재판이 끝나고 변호사가 이마에 땀을 닦으며 남자에게 말합니다. "축하합니다. 판사가 무죄라고 하는 걸, 제가 벌금형으로 바꾸느라 힘들었어요." ’무죄가 아니여야 수임료를 받으니까요.
미국은 소송의 나라라는 별명에 걸맞게 조금만 트러블이 생겨도 법정에 가려 듭니다. 변호사를 풍자한 대표적인 영화로 짐 캐리 주연의 '라이어 라이어'가 있습니다. 거짓말을 못하게 된 변호사가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보여줍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릴까요? 20세기 무렵, 원래 있던 자연법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자연법이 뭘까요? 이걸 설명하려면 먼저 영원법부터 말해야 합니다. 영원법은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사물 안에 일정한 목적을 새겨두셨다는 법’입니다. 초식동물은 풀을 먹어야 하고요. 육식동물을 초식동물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은요? 이들을 잘 보살펴야 하지요. 이것이 인간을 만든 하느님의 목적입니다. 그럼 자연법은 뭔가요? ‘지성적 창조물 안에 있는 영원법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성을 갖고 있지요. 그 지성을 이용하여 생명을 존중하고, 선한 행동을 하며 악한 것을 피합니다. 자연적인 본능이 있지만 해로운 것을 거부하면서 참답고 선한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나온 계명이 십계명이지요. 사람을 죽이지 말라. 부모를 공경해라. 도둑질 하지 마라. 자연법의 참여로 세상의 질서는 잡힙니다. 유행을 타지도 않지요.그래서 자연법의 원천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하나는 인간의 이성적 본성입니다. 우리 안에 새겨진 선한 목적에 부응하는 경향이 인간 본성 자체입니다. 또 하나는 하느님 자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본능적 욕구를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가끔 달력이나 풍경에 볼 법한 유럽의 높은 산에 있는 호수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목을 축이려고 호숫물을 마십니다. 호숫물은 우리의 갈증을 덜어줄 첫째 원천이요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 호수의 물은, 산 정상에 있던 얼음물인 빙설이 녹아 흘러내려 생긴 것으로 밑에 채워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빙설은 호수에 물을 공급하는 원천입니다. 이제 정리해봅니다. 우리가 마신 물은 호수의 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물의 원천은 실상 산 정상의 빙설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법의 원칙은 인간의 본성과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본성은 자연법을 담은 첫 장소이고요. 하느님은 영원법이란 이름을 가진 법칙의 최종 원천이며, 근원적 원천이 됩니다. 허나 이것을 거역한 이들이 나옵니다.
20세기 유대인이면서 미국인인 법철학자 한스 켈젠이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난 변형된 형태의 법학 이론을 세웁니다. 그의 엄격하고 논리적인 법실증주의, 근본규범은 결국 자연법의 이론을 대체할 수 있었고, 지금 그런 세상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규범은 모든 단계의 정점을 이루는 최고규범으로 국내법 질서의 체계가 곧 국가라 보면서 법과 국가를 동일시 여기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근대국가에서 ‘법률을 제정하는 일’ 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권력으로 변질됩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국가사회주의라는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오늘날 법률가, 정치인, 학자들, 평범한 사람들은 상식을 좋은 의미로, 널리 통용되는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진리를 합의와 동일시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결정할 때 다수결이 최고라 여깁니다. 하지만 진리는 이와 다릅니다. 인간의 본성이 항상 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수에 의해 진리가 묻힐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유처럼요. 정당한 법의 원천으로 국가가 추구하는 자유주의가 모든 결정과 모든 권한을 다수와 소수의 힘 있는 인간에게 맡겨버려 예를 들어 태아를 죽이는 것을, 동성간의 결혼이 합법하다는 이유를 ‘자유 결정권’이라는 합법적인 결정권이라고 말하는 사태에 치닫습니다. 이게 옳은 일일까요?
오늘 주님은 그 당시 법을 넘어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보게끔 이끄십니다. 앞서 예에서 호수에서 물을 먹는 경우에, 내가 비록 호수의 물이 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빙설에서 내려온 것임을 몰라도, 나는 호수의 물을 마시며 갈증을 풀 수 있습니다. 즉 무신론자이지만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요. 여러분은 믿음의 생활을 하며 과연 하느님을 떠올리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