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주일

2023. 10. 21. 오후 12:5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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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9주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주일.

이사 2,1-5; 로마 10,9-18; 마태 28,16-20

 많은 교우분들이 부담스럽게 여기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평신도 직무에도 분명히 쓰여 있지만 사제직, 왕직, 예언직 중에서 예언직인 복음선포에 관한 사항을 부담을 느끼거나 소홀히 하는 경향입니다. 분명 오늘 말씀에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하셨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잘 그러질 못합니다. 예전에는 가두선교를 하면서 길거리에서 주보를 나눠주며 선교를 했고요. 이번 옆 본당에도 이번에 그것을 해보겠다고 하지만, 만약 제일 중요한 무언가가 빠진 상태에서 그것을 하다간 오히려 낭패를 볼 수 있겠다는 조심스런 생각을 가집니다. 무언가가 빠진 것이란 이런 겁니다 자기 안에 힘이 없는데 나눠줄 것이 있겠는가? 자신에게 집착하는데 나눠줄 이유를 찾을 수 있겠는가?’ 단순하게 평신도 직무 중 예언직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릴 수는 있지만 그게 여러분에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교주일이니까.. 저러는 가보다 하는 수준일 수 있으니까요. 진짜 문제는 관심과 사명 이행의 필요성입니다. 내가 와닿지 않는데 그걸 전할 수 있을까요? 잠시 불교의 가르침을 소개하면서 우리의 상태와 접목시켜 보겠습니다.

 성철 스님의 가르침으로 유명했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게 있습니다. 이 말은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란 책에서 다섯 명의 큰스님이 금강경을 해설한 책입니다. 여기에 산시산(山是山) 수시수(水是水) 불재하처(佛在何處)’(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단 말인가)라는 야보(冶父) 스님의 시구에서, 성철 스님은 맨 앞 구절만 인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뜻을 헤아리기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그럼,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겠냐며 별 실없는 소릴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진리를 인식하는 3단계가 숨어있는데요. 첫째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둘째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로다, 셋째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의 진리를 깨달아가는 과정입니다. 첫 단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는 깨달음이 일어나기 전, 일반 중생이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이 다 이 수준에서 일생을 살다 갑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며,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모든 것이 다 분리된 개별적 존재로 여기며 상대적인 세상으로 보고 삽니다. 자기의 근원에 대해서 의문도, 관심도, 노력도 없이 허상 속에 자기에게 꽂히는 것만 매달리며 삽니다. 그러다 둘째 단계로, 그들이 말하는 부처를 만나면 더 이상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단계입니다. 내가 알던 것이 더 이상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진리의 맛을 느끼는 것이죠. 그러다 셋째로 처음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임을 깨닫는 차원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세상 모든 것이 부처의 법임을 알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도 부처가 어디있냐?‘ 고 따지는 것은 여전히 자기 세상에 갇혀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의 신앙관도 발전하는 신앙입니다. 처음에는 자기가 원한 것을 얻으려고 직업을 택하고, 소유하고, 종교마저 이용가치를 따지며 선택했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을 음미하면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영원하신 주님 앞에 내가 욕심냈던 것들이 하찮고 부질없어 보이고, 그러했던 삶이 자신에게, 남에게, 하느님께 죄송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해주시는가? 를 깨달으며 다가오는 것들에서 주님을 통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실이 다져지고, 번아웃, 우울함이 사라집니다참된 것을 만났기 때문이고요. 그분을 통해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인헌동 교우 여러분

 소문을 잘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입이 가볍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자신 안에 그것을 담아놓기에는 너무 크기에 터뜨려 전달할 수 밖에 없음을요. 2독서에 나옵니다.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지 않은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네가 배운 것을 남에게도 가르쳐 봐라. 그러면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우린 누군가를 통해 목소리를 들었고, 당신을 만났으며 이제 그 좋은 것을 남에게도 알릴 때, 내가 하는 것들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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