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뭔가를 배우려면 거기에 합당한 조건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요사이 보이는 올림픽 운동선수들처럼 올림픽 전에 나갈 선수들끼리 경합을 벌입니다. 미리 몸을 만들어야죠. 체중을 조절하고, 근력을 키우고,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꾸준한 일관성을 유지시켜야 체력이나 멘탈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신앙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속된 내가 거룩함을 동경할 수 있습니다. 좋아보이니까, 순수하니까, 감히 내가 가지지 못하는 것을 얻고픈 욕구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걸 얻으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복음에 나옵니다. 많은 이들이 “어디를 가시든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호기롭게 말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조건을 내걸며 시작합니다. “아버지 장사를 지내러 가게 해달라.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입니다. 물론 오늘날에 와서 무리한 요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그 정도는 들어줘야 하지 않나? 여길 수 있습니다. 여기엔 이런 것이 들어있습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여긴 것과 하느님의 것이 동등화 될 수 있는가?’입니다. 가치기준을 ‘나’에서 ‘하느님’ 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이 부르심을 받습니다. 수도원이건, 신학교건, 재속회원이건간에요. 허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망설이고 그러면서 위성처럼 주변을 맴돌며 시간만 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들은 문턱에 걸려있었습니다. 일단 자신을 내려놓으면 나머지 것을 주실텐데 그들은 하느님이 주실 수 있는 것에 대해 신뢰를 느끼지 못하고 계산하다가 거기서 돌아서 버립니다. 정보는 많아지고 학력은 높아졌지만 지혜로운 인물이 왜 나오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가치기준에 막혔기 때문입니다. 제가 20초반 무렵에 어떤 선배가 당부합니다. ‘넌 많이 깨져봐야 해’ 마치 막말 같지만 저에게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말을 했던 이유는 자신의 틀을 깰 때, 다른 세계관을 접하면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먼저 내려놓은 사람은 나머지 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체험을 들으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적으로 부족했던 부분도 채워주시면서 바꿔주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자신이 부유했던 삶을 살았지만 부유함이 자신을 살려주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했기에 기쁜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선택한 가난은 쪼들리지 않기에 검소하면서 가뿐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린 현실의 만족을 추구하고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걸 감내할 바탕도 마련되어 있습니까? 자신에게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채워주시는, 변화시켜 주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