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22주일. 예레 20,7-9; 로마 12,1-2; 마태 16,21-27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가요?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업적은 어디까지일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영성가에게 현대 과학의 업적을 다룬 기록영화를 보여주고서는 뽐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막에 물을 댈 수 있고요.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을 이용할 수 있고요. 먼 별의 구성과 원자의 구조를 탐색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연정복은 곧 완성될 겁니다.” 영성가는 감명을 받았지만 곧 수심에 사로잡히면서 집에 돌아와 이렇게 말을 꺼냅니다. “왜 자연을 정복해? 자연은 우리의 친구인데.. 그 모든 에너지를 단 하나의 인류의 적인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쓰지는 않을까?..”’ 우리가 가진 원초적인 두려움은 뭘까요? 네. 죽음이지요. 모든 것이 끝난다는 뜻이니까요. 어르신들이 계신 요양원에 가보면 느낍니다. 말씀으로는 ‘내가 죽어야지’ 하시지만 실은 ‘더 살고 싶다’ 는 눈빛이 보입니다. 그렇지요. 누가 그렇게 끝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영원할 수 있는 방법이 그러하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반박합니다. “고난을 받고 죽임을 받았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에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며 손사래를 치지요. 네. 누구나 자기만의 계획이 있습니다. 죽으면서 없어지고 망가지고 싶은 사람은 없지요. 여기서 이런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지혜와 하느님의 어리석음 중 어떤 것이 더 큰가? 라고요. 고린토1서 1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뭐가 어리석고 뭐가 지혜로울까요? 누가 묻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노력이 중요하다고요. 여기에 영성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영성에서 중요한 것은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맡김입니다. 물에 빠졌는데 헤엄칠 줄 몰라 두려워서 빠져죽지 말아야지 빠져죽지 말아야지 하며 손발을 이러저리 내저으며 버둥거리다가 불안한 나머지 물을 더 마시게 되니, 필경 빠져죽고 말지요. 반면에 생각하고 애쓰려 들지 말고 바닥까지 내려가도록 내맡겨 두면 몸이 절로 떠올라 물 표면으로 돌아오지요. 이게 영성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내맡기시나요? 말로는 주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당신은 그저 그렇다고만 하세요’ 라는 답정너의 상태가 얼마나 많습니까? 뭘 주님께 묻습니까? 답을 이미 냈는데요. 하지만 그건 우리 스타일이 아니지요. 우리 눈에 보기에 하느님의 방법은 어리석게 보일 수 있습니다. 마치 잔머리와 큰머리의 차이처럼 보입니다. 잔재주를 부리는 사람은 원대한 계획하에 움직이는 사람을 이겨내지 못랍니다.여러분은 어떠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