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9주일

2023. 8. 12. 오후 12:36:43

글자

연중 19주일. 1열왕 19,9-13; 로마 9,1-5; 마태 14,22-33

 ‘여러분은 현재 잘 보이십니까?’ 이는 육체적인 시력이 건강하시냐?는 질문은 아닙니다. 내가 살아야 할, 나답게 가야할 길이 잘 보이면서 살고 계시느냐?를 여쭤본 겁니다. 그동안 교회가 여러분에게 덜 알려드린 게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들으신 적은 있으십니다만, 이것을 중요하게 강조하진 못했습니다. 특히 요사이 몇십년간 말이죠. 그 이유는 요즘 세상 유행이 그랬습니다. 가끔 서양인들 중에서 뭔가를 찾는다고 동양에 와서 선 공부를 하고, 머리를 밀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나름 이유는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종교에서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여겨서 멀리 이곳까지 온 겁니다. 저도 그런 걸 봤습니다. 예전 지리산 쪽 방면에 어느 절에 들어가 관광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거기 여승이 제게 말을 건냅니다. ‘뭐하는 분이세요?’ ‘. 서울에 사는 신부입니다했더니 놀라면서 자기가 서울에서 살 때 천주교 신자였더랍니다. 헌데 어떤 스님의 책을 읽고 머리를 깎았다고 전해줍니다. 제가 해줄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 성불하세요~’ 이미 그쪽 사람인데요. 저는 그곳을 떠나며 생각했습니다. 천주교에도 현실계를 넘어선 세계를 가르치는 것이 있는데 이분은 몰랐구나 그러면서 한편 모르는 신자들은 더 많겠구나 여겼는데요. 이렇듯 이미 우리가 갖고 있었던 것을 아시는지요?

 여기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우린 물질의 현상계를 살고 있습니다. 근데 물질적인 것에만 집착하고 사로잡힐수록 허전함을 만납니다. 채워진 듯 여겼지만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고요. 그 사실이 나를 더 괴롭게 하는데요. 우리가 여기에 왜 왔습니까? 뭔가를 얻고 싶어서입니다.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기적입니다. 사람이 물을 건너려면 배가 필요하지요. 하지만 배는 단지 도구일 뿐인데 가끔 이것을 절대적인 가치로 여깁니다. 마치 돈, 핸드폰, 자동차처럼 없으면 안될 것 같다고 여기지만, 그것에 집착할수록 내 마음은 허전해집니다. 우리가 물을 건널 수 없다고 속단할 수 있지요.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몇 발자국을 건넜고요. 이내 불어오는 바람에 그만 두려워져서 물에 빠지긴 했지만 짧은 순간 그는 걸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말씀드리는 것 같습니까? 현상계를 넘어선 삶의 가능함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잃어버린 것을요.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는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들어보셨지요? 이것은 내 생각에 참여한 내가 곧 나이고, 그것이 나의 활동으로 이어진다는 물질계의 나를 내세운 사고방식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배운 영혼 등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배운 철학의 대부분이 현대철학이기에, 그 이전부터 있었던 그리스도교가 습득해온 생각의 체계는 모르기에 우린 혼란해집니다. 일단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었고요. 이것은 여러분 잘못은 아닙니다. 중세 역사가 부정되면서, 일제 치하에서 독일을 통해 들어온 교육이 전부라 여겼기에 그리스도교가 가르친 것이 여러분이 알던 것과 혼동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데카르트 이전의 사람들 그리스 사람들은 무어라 여겼을까요? 데카르트 방식으로 푼다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존재한다 즉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것이고, 나를 실제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이 이끌어줘서 가능하게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좀 다르지요? 데카르트는 현상계에 사로잡힌 를 드세운 사고라면, 그 이전 사람들은 나의 영혼을 이끌어주고 움직이는 그 무엇과 일치될 때, 나는 제대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식합니다. 우린 살면서 이미 압니다. 사람의 한계를요. 내 생각이 항상 올바르지도 못하고, 부족하다는 것을요. 그래서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우리에게 하느님이 계시시죠.

 1독서에 그것이 잘 나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만나는데 당신은 있어보이고 그럴듯한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지나고 조용하고 부드러움 속에서 계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있어 보이는 것에 매료되지만 실제로 당신은 그런 것을 넘어서십니다. 여기서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린 하느님을 아는 데에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당신과 하나될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을요. 나의 차원을 넘는 것을 믿고, 그 믿음을 내 생각을 통해 헤아려갈 때 나는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따르려는 분과 얼마나 일치되시나요? 우리 삶의 성패가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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