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6주일. 지혜 12,13-19; 로마 8,26-27; 마태 13,24-43
주변에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이럴 수는 없어..’ 요즘 세상에 대해 비관적인 태도와 더불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하느님이 이렇게까지 놔두신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고요. 곧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의미까지도 포함될 수 있는 발언입니다. 충분히 분노할 만하고요. 그 사람 입장에서 할 법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 구별해놓고 악한 일을 저지른 이를 싹 잡아다가 엄벌에 처하면 세상은 깨끗해질 것이라고’요. 과연 그럴까요? 이 세상은 착한 사람이라고 평생 착한 것도 아니고요. 악한 사람이라고 항상 악하지는 않습니다. 평범했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큰일을 저지르기도 하고요. 범죄자였던 사람이 회개하여 돌아서기도 합니다. 문제는 ‘낙인을 찍는 행위’입니다. 낙인효과는 그 사람을 옭아매지요. 새롭게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데요.
오늘 말씀은 밭의 뿌려진 씨가 누군가 뿌린 가라지와 함께 자라는 내용입니다. 단순하게 잡초같은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좋은 것마저 훼손할 수 있는 민감한 현실입니다. 즉 일단은 같이 있어야 하는 형편입니다. 물론 괴로울 수 있습이다. 앞서 이야기처럼 싹 뽑아다가 태워버리면 속은 시원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그런 심판의 권한은 없습니다. 설령 심판을 한다 해도 진정 회개하지 않은 이에게 내려진 심판은 앙심을 품게 되고요. 다음 범죄를 노릴 것입니다. 그럼 다른 사람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교황님이 제정하신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이하며 우린 나이가 들면서 생각의 변화와 원숙함을 지녀야 합니다. 비록 몸은 늙을지라도 우리 마음까지 말라 비틀어지게 놔둘 수는 없지요. 내가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나에게 주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최선의 선함을 추구할 때, 나는 내 역할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린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땅을 밟고 있는 현실에 맞춰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위대한 성인, 위인들도 그러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의 시대를 살며 최고의 것을 추구했습니다. 심판의 권한은 없지만 ‘제 탓이오’ 의 정신으로 나를 관리하며 사랑을 통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해줘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나와 여기 있는 우리들 모두를 위해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