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5주일. 이사 55,10-11; 로마 8,18-23; 마태 13,1-23
오늘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예전 중국 남북조시대 사람인 설차화상이 지은 시 한 편 읽으며 시작하겠습니다.
푸른 모 쥐어 논에 가득 심고 / 고개 숙이니 물속의 하늘이 보이네
마음이 맑고 깨끗하니 비로소 도를 이루고 / 뒷걸음치는 것이 원래 앞으로 나아가는 것
이제는 기계로 모내기를 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기계가 못하는 구역은 사람 손이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구절에 나온 것처럼, 모를 심을 때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심는 것이 제대로 된 방향입니다. 보통 사람들처럼 생각하면 안되지요. 고개를 숙일 때, 물속에 비친 하늘을 보며 한 해 농사가 잘되길 바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거꾸로 가야만, 참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저 모를 심을 때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의 이익을 얻고 싶다고 목표를 향해 무조건 매진하기보다, 먼저 주님께 겸손된 자세로 머리를 숙이는 자세가 필요하구요. 모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일 줄 아는 희생과 헌신도 필요한데요. 여러분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어디까지 희생을 하시나요?
오늘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농사꾼이 비싼 씨를 아무데나 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허나 여기에 이런 게 숨겨져 있지요. 뿌린 씨가 어떻게든 잘 자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비단결처럼 곱지 않지요. 누구는 생각없고, 관심없고,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려들고, 욕심 많고.. 당연히 아무리 좋은 것도 ‘백약이 무효’라는 말처럼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기적을 베풀어도 효과는 없습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는 말씀에 대해 기분 나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가르침이 그렇잖습니까? 관심있는 사람은 효과를 보고요.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진리가 더 가까워지는 법입니다. 즉 준비가 안된 이는 은총이란 좋은 것도 내게 심기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은총을 알아보고 받아들일 준비가 잘 되어 있습니까?
농민주일입니다. 우리야 농수산물을 마트나 시장에서 사다먹는 입장에서는 그저 가격이 싼 것만을 찾으려들지만, 그것을 길러내고 추수하고, 유통하는 사람들 입장은 다르지요. 1994년부터 시작된 우리농촌살리기 운동본부가 있습니다. 이곳에 참여한 농부들은 농약을 쓰지 않습니다. 농약을 뿌리면 옆 땅에도 피해를 주기에 그들만의 유기농을 유지하느라 많은 애를 씁니다. 단순한 유기농이 아닙니다. 올해 농민주일 담화문에 실린 내용입니다. ‘유기농은 합성비료와 살충제를 쓰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작물이 필요로 하는 영양분을 토양 미생물에서 얻습니다. 이 미생물들은 토양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생명체는 사람들이 해충이나 잡초라고 부르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산업농업이 해충과 잡초를 박멸하려는 접근방식을 가진다면 유기농은 모든 생명체의 중요성과 상호 연결성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유기농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체의 대량학살을 가져올 수 있는 산업농업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농업을 선택함으로 모든 생명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찬미받으소서 217항’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느님 작품을 지키는 이들로서 우리의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 성덕생활의 핵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체험에서 선택적이거나 부차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결국 ‘땅을 지키고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하느님이 주신 소명이고요. 100년도 채 못살고 가는 우리만의 세상이 아니라, 이곳은 다음 세대에게도 물려줘야 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생태 사도’ 라고 부릅니다. 요사이 날씨를 보십시오. 지금의 기후위기를 보십시오. 결국 누구의 탓일까요? 산업혁명 이후부터 지금 세대까지 환경을 이용만 하려 들었지, 보존하지 않았기에 이런 피해를 보고 있잖습니까? 2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왔지요.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결국 결자해지(結者解之)를 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사랑하는 인헌동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봉헌성가를 부르실 때 저는 하느님께 바칠 예물을 준비하며 이런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하소서” 하느님에게 얻은 빵을 은총을 통해 변화된 성체가 여러분에게 전달됩니다. 이게 경제적인 논리로 설명이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