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십니까? 불과 1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죠.. 하지만 실제는 어떠합니까? 생각은 품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걸 볼 때, 그 거리가 상당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갈등과 어려움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정작 해야 할 것과 실제로 하고 싶은 것과의 갈등입니다. 살면서 썩 내키진 않지만 꼭 하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요즘 뉴스처럼 나에게 아이가 생기면 버리거나 죽이지 말고 잘 키워야 하지만, 욕심과 이득에 사로잡히면 나는 망가지고 사회는 병들게 됩니다. 마치 민간업자에게 넘겨서 이득을 더 내고 싶겠지만 실제로는 국가가 틀어쥐고 살림을 맡아야 국민들이 편해지는 것처럼. 그래서 늘 힘들 수 있습니다. 특히 안 하고 싶은 것을 요구 받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은 6월 25일입니다. 이젠 전쟁 이후에 태어난 이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남북이 화해를 하고 통일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세상입니다.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 현실이지요. 대신 전쟁을 겪은 세대는 피해자로 살아온 상처와 울분이 있고요.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가족과 헤어진 슬픔과 아픔에 여전히 힘겹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자기 기득권을 누리느라 대답없는 그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버겁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일흔 일곱번까지 사랑하라” 니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에는 우리 사이에 벌어지는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 문화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기본인권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모순이 없는 건 아니지만 도덕적 상대주의로 나타나 교회 가르침이 마치 특정 편견을 만들어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처럼 가르친다고 여깁니다.’ ‘왜 교회는 나에게 사랑하라고 강요하느냐?’ 라는 주장에 대해 설명해보겠습니다. 이젠 주님이 알려주신 사랑마저도 개인적인 세속성에 물드는 현실이라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사랑에만 머물면, 우린 결국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왜 하느님은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을까요? 왜 예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현실의 노예로 살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노예로 살길 바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만, 결국 그 인생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사랑은 어디쯤 머무는 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린 자꾸 나 혼자 하려 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하셨으니 여기에도 계실 겁니다. 그분의 힘을 통해 부족한 사랑을 더 배워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