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2023. 6. 24. 오전 6: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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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십니까? 불과 1m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죠.. 하지만 실제는 어떠합니까? 생각은 품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걸 볼 때, 그 거리가 상당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갈등과 어려움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정작 해야 할 것과 실제로 하고 싶은 것과의 갈등입니다. 살면서 썩 내키진 않지만 꼭 하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요즘 뉴스처럼 나에게 아이가 생기면 버리거나 죽이지 말고 잘 키워야 하지만, 욕심과 이득에 사로잡히면 나는 망가지고 사회는 병들게 됩니다. 마치 민간업자에게 넘겨서 이득을 더 내고 싶겠지만 실제로는 국가가 틀어쥐고 살림을 맡아야 국민들이 편해지는 것처럼. 그래서 늘 힘들 수 있습니다. 특히 안 하고 싶은 것을 요구 받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은 625일입니다. 이젠 전쟁 이후에 태어난 이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남북이 화해를 하고 통일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세상입니다.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이 현실이지요. 대신 전쟁을 겪은 세대는 피해자로 살아온 상처와 울분이 있고요.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가족과 헤어진 슬픔과 아픔에 여전히 힘겹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자기 기득권을 누리느라 대답없는 그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버겁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일흔 일곱번까지 사랑하라니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에는 우리 사이에 벌어지는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 문화에서 교회의 가르침이 기본인권에 반하는 행동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모순이 없는 건 아니지만 도덕적 상대주의로 나타나 교회 가르침이 마치 특정 편견을 만들어 개인의 자유를 간섭하는 것처럼 가르친다고 여깁니다.’ 왜 교회는 나에게 사랑하라고 강요하느냐?’ 라는 주장에 대해 설명해보겠습니다. 이젠 주님이 알려주신 사랑마저도 개인적인 세속성에 물드는 현실이라고요. 그래서 하고 싶은 사랑에만 머물면, 우린 결국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왜 하느님은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켰을까요? 왜 예수님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현실의 노예로 살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노예로 살길 바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만, 결국 그 인생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사랑은 어디쯤 머무는 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린 자꾸 나 혼자 하려 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하셨으니 여기에도 계실 겁니다. 그분의 힘을 통해 부족한 사랑을 더 배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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