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1주간 화요일. 2고린8,1-9; 마태 5,43-48
기도하는 사람은, 늘 도전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직면할 때에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불편해 왔는지, 간과했는지 그제서야 알아차립니다. 그 도전은 ‘더 큰 사랑, 더 큰 선함’ 으로의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이들의 느끼는 입장은, 초대라기보다 무모한 도전, 불가능하게 여겨지곤 합니다. 그 이유는 남들은 그렇게 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신은 불가능해 보이는, 이 불편한 안을 제시하는 이유가 뭘까요?
기도하는 이들은, 늘 가지고 있는 본능이란 성(城)을 탈출할 채비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 본능은 처음에는 나를 지키는 것이라 여겼지만 결국엔 다른 이에 대한 사랑은 없는 외로움으로 날 이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생각의 사이즈가 다르십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 비를 내려주신다.” 순간 ‘왜 그러세요?’ 라고 따질만 합니다. 가만히 자연의 동식물을 보면 그렇습니다. 강한 동물은 모든 동물을 집어삼킬 나름의 무기가 있지만 힘없는 동물도 그 안에서 살아갈 재주가 있습니다. 그 능력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우린 동물보다 나은 존재이죠. 그렇다면 본능보다 더 큰 차원으로 건너가야 하는데요. 여기에 독서의 바오로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사랑으로만 살아간다면 ‘그 정도 수준’ 일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초대합니다. ‘더 큰 것도 있다.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그 사랑을 세상에 제시하며 아름다운 세상, 하느님의 나라를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라고요. 저는 그런 것을 만나고 싶습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주님의 초대에 응할 때 변화되는 나 자신부터 만날 때, 우리의 인생은 한층 새로워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