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토빗 1,3-2,8; 마르 12,1-12
가끔 불만이 일어납니다. ‘왜 선한 사람은 더 힘들고 고생하는가?’ 라는 자조섞인 질문이 나옵니다. 실제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열심한 사람은 피해를 받고요. 대접받지 못하고요. 억울한 사람은 떵떵거리며 잘 사는 듯 여겨지는 시대에 ‘내가 이런 것을 꼭 해야 하는가?’ 라는 억울함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보니파시오 주교님이 착한 일을 하다가 순교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말씀들도 그렇습니다. 복음에는 포도밭 주인의 아들이 소작인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소작인이면서도 포도밭을 탐냈기 때문입니다. 토빗기 독서는 당시 상황이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는 시절이었습니다. 가난한고 힘든 사람을 찾아나서지만 그들은 죽음을 당했고, 그의 행동에 대해 이웃들은 비웃습니다. 상황이 이쯤 돌아가면 마음을 접고 마음을 접고 아무 것도 안하고 싶지만 이것을 아십니까? 하느님의 구원이 그런 어려움을 통해 생겨난다는 것을요. 오히려 하느님의 계심이 그런 시간에서 이뤄져 체험하게끔 이끄신다는 것을요. 솔직히 좋은 모습만 보고싶고, 안 좋은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이 신앙 안에는 이런 면이 있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에서 얻게 되는 구원’을 말입니다. “살려고 하는 자는 죽어야 한다” 거나 “첫째가 되길 원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거나 “고난을 겪어야 다시 살게 된다” 는 가르침입니다. 어려움을 피하고 싶지만 그렇게만 하면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도망가려는 문제가 생깁니다. 오히려 우린 하느님이 알려주려는 세계관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악한 이에게나 선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며”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는” 위험을 말씀합니다. 많은 이들이 ‘악을 죽여야 한다’ 고 여기지만 악을 없애면 악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지만, 사랑하는 마음마저 없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진 복수심이 내 사랑마저 말려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우리가 가진 좋은 것을 어찌 틔워 나가야 할까? 살펴야겠습니다. 그때 당신의 섭리가 보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