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6주일
살면서 별별 것을 다 겪습니다. 세상이 늘 변하니까요. 그래서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경제학자란, 그가 어제 예측한 것이 왜 오늘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내일이 되어야 비로소 아는 데 전문적인 사람이다.’ 그들도 잘 모릅니다. 이렇듯 불확실한 시대를 삽니다. 믿어왔던 것들에 대해 배신을 당하는 세상입니다. 예상되는 연금은 시일이 밀리고요. 예상된 금액의 저축은 금리가 떨어지고요, 평생직장은 없고 은퇴 후 새 직장을 알아봐야 하고요. 갑자기 전셋집 주인이 사라져 세입자는 애를 태웁니다. 그야말로 각자도생의 삶이 펼쳐집니다. 여기에 해당된 국가나 정부에서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합니다. 과연 무엇을 믿고 의지해야 할까요? 그럼 왜 이런 세상이 되어가는 지 보겠습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많은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인문학의 실종의 시대라고요. 철학의 부재상태라고요. ‘세상이 요구하는 당장의 쓰임새만을 생각한다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이란 한낱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고요. 인문학은 당대의 사회공동체의 영혼을 구성합니다. 사회공동체의 미래 비전도 인문학적 상상력 없인 제대로 세울 수 없지요. 그런데도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인문사회과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합니다. 대학존재의 주된 이유가 학문이 아닌 취업대기소가 된 지 오래입니다. 학문의 위기, 특히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한 사회공동체의 비판의식 마비와 철학의 실종, 그리고 윤리의 타락을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점차 사람들이 계산적으로 변했나 봅니다. 공익을 담당하는 이들이 사익추구에 힘쓰니, 제대로 된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이득에 연연하는 사태가 빚어집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인은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우리에게는 믿음과 소신과 양심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이걸로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당장에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불안함에 시달려, 세상이 제시하는 것들이 그럴듯해 보여서 그것들을 따라갔습니다. 하느님이 멀어지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제가 그것을 타박하거나 무조건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불나방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이제 지나보니 무엇이 보이시나요? 과연 내가 쫓았던 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나요? 자칫 여러분이 지켰던 것이 나약해 보일 수 있었습니다. 대세의 흐름과 달라 보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길게 보십시오.
주님의 가르침이 시대에 따라 변했나요? 오히려 꾸준했습니다. 성실했습니다. 답답할 정도로 무던했습니다. 그랬기에 오히려 믿음직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에 푹 잠기면 뭔가 보인다는 것을요. 매일 변하는 세상에서 대처하는 것은 참으로 피곤하고 불편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내가 발을 땅에 딛고 사는 한 말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복습입니다. 신앙은 예습보다는 복습에 가깝고요. 되새김을 잘해야 합니다. 그럴 때 보이기 때문이지요. 먼저 배웠던 가르침을 새기고, 이를 현실화 시켜봅니다. 작금의 현실의 문제점을 살피면서 내가 해야 할 것을 선택합니다. 비록 당장에는 손해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격려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인헌동 본당 교우 여러분
푹 잠겨보십시오. 그분의 가르침과 영의 활동이 무엇을 보여줄까요? 이런 열매를 맺습니다. 나의 신중함, 지혜로움, 없던 용기가 나오고, 결단력과 행동을 통해서 내 인생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좋은 방향, 선한 방향으로 말이지요. 우리 모두는 그런 힘을 부여받았습니다. 당장의 내일 일이 어떻게 펼쳐질진 몰라도 우린 쉽게 흔들리거나 불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통해 무엇을 부여 받았는 지 잘 헤아려보시며 ‘지금 당장’ 에만 목매지 않으면서, 비록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는 강인함의 삶으로 거듭나시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