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우린 잘 살고 싶습니다. 잘 살고 싶어서 고생을 감수하고요. 잘 살고 싶어서 자존심이 뭉개져도 이를 악물며 버팁니다. 그럼 이런 것을 살펴보지요. 세상 일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교회에서나 하느님의 일은 꼭 내 맘대로 돌아가야 할까요? 그것이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대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일까요? 그렇다면 나는 내 소망이 이뤄져야 한다는 보상을 얻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여기 나온 것일까요?
물론 뭔가 빌어서 얻는 기복신앙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기본적인, 원초적인 신앙의 형태입니다. 매달릴 곳이 없으니 하느님에게라도 빌어야 하는 것은 꼭 천주교의 신앙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하는 행동입니다. 헌데 현실적으로 여기서마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인생이 꼬여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때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다른 플랜 비(Plane B) 가 있습니까?
어제에 이어진 오늘은 무엇이 보입니까? 어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예수님이었다면 오늘은 처참한 아들의 모습을 봐야하는 어미의 심정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누가 자기 아들이 ‘저 지경’ 이 되길 원하겠습니까? 여기에 아들 예수님은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며 ‘나는 이러려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있으니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입니다. 복음 전 읊었던 부속가의 내용은 하나같이 슬픕니다. “비통하게 우시네.. 누가 울지 않으리.. 저도 울게 하소서” 등 침울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십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지금 이 시간은 구원으로 가는 여정의 터널이라는 것을요. 남들은 ‘저렇게 죽으니 무슨 소용이야’ 싶겠지만 당신은 그 다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모님도 여기에 말없이 동참하십니다. 슬픔을 잘 눌러가면서요.
결국 성모님은 잘 사셨습니다. 그 과정을 잘 견디고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린 어찌하고 있습니까? 잘 버텨가고 있습니까? 그 다음을 내다보십니까? 우리고 그러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