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4주간 토요일. 아모 9,11-15; 마태 9,14-17
수도자라면 종신 서원 전에, 교구 신부라면 부제품 전에, 일반 평신도에도 시간을 들여서 하느님과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하는 영신수련이라는 이냐시오 피정이 있습니다. 1500년 경 이냐시오 성인이 개발한 이 기도 프로그램은 1, 사람이 태어난 목적을 알고요. 2. 사람은 하느님을 뜻하심을 이루는 도구라는 것. 3. 원래 가지고 있는 욕망이 하느님의 뜻에 방해가 된다면 멀리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나는 뜻 모를 하느님의 뜻을 과연 잘 받들고 수용할 수 있을까?’ 라고요. 앞서 말씀드린 묵상 프로그램은 내가 태어난 목적을 찾고, 내 욕망과 하느님의 뜻이 부딪힐 때, 나 자신을 접을 줄 알아야 한다는 묵상입니다. 헌데 요즘같이 ‘자아’ 가 강한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을 더 크게 생각하는 풍토에는 쉽지 않은 방식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지금도 이 방법을 공인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심정은 어떠신지요?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인물들이 그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란 주님의 음성에,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주십시오” 라며 부름에 응답하고 있고요. 복음은 당신과 함께라면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함께 하자는 제의를 해오십니다. 여러분은 이 상황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우리가 워낙 험난한 세상을 살기 때문인지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며 못미더워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라 할 지라도 말이지요. 이럴 때 무엇이 필요할까요? 모든 것을 넘어선 ‘초월적인 신뢰’ 의 대상을 만날 때, 그런 관계에서 체험한 그 무엇을 만나야만 더 이상의 불안함은 없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말로는‘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고, 안정되지 않고 있다면 이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병보다는 건강을, 가난보다 부를, 불명예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를 원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원리와 반대되는 본능에 충실할 뿐이지만 교회는 그걸 거스르며 창조된 목적을 찾고 있는데요. 주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우릴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