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6주간 수요일. 사도 17,15-18.1; 요한 16,12-15
요사이 시대는 감각적인 것에 치중하는 시대입니다. 현실적이고 물질 위주의 사회라서 내 손에 뭔가 만져져야 하고요. 괜찮게 보여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 우리가 감각적인 것에 휘둘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려고 이렇게나 애쓰는데, 자꾸 예전 믿지 않던 시절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시는 경우를 보곤 하는데요.
오늘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동안 교회는 수많은 이단 논쟁을 통해 지금까지의 교회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교회의 역사는 싸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싸움이었을까요? 주님께로부터 오는 영과, 주님에게서 오지 않은 영과의 분별과 식별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불편케 여기거나 귀찮게 여기는 이들은 무분별하게 자기가 원하는 방식의 믿음을 갖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계치유’ 가 있습니다.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육체적, 정신적, 영성적으로 악영향을 끼치기에 가계치유 기도와 가계치유 미사로 그 사슬을 끊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성모님이 발현했다는 나주의 윤 율리아 사건 등, 어떻게든 사람에게 뭔가 느껴지게 하려는 주장과 시도는 사람들을 현혹케 하고 교회를 혼란케 만들어 왔는데요.
여기에 영성가인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말합니다. 영혼이 한 곳에 머물지 못하게 막는 세 가지 형태가 있는데 ① 영혼이 산만하고 통일되지 못하여 사람이 만든 피조물에 끌릴 때 ② 영혼이 현세 사물과 관계하며 그 사물에 뭔가 있다고 여길 때 ③ 영혼이 육체로 향해서 하느님과 일치됨을 막을 때라는데요. 주님의 영은 현실의 차원뿐 아니라 우릴 넘어서는 초탈의 경지까지 이끄십니다. 물론 광범위한 범위이고요. 쉽지는 않은 차원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어떻게든 당신과 만나고 싶어서 무리수를 두곤 합니다. 마치 독서에 나온 ‘알지 못하는 신’ 이라는 석상을 세우면서 말이죠. 물론 감각적인 것을 통해서라도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나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시도이지, 참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행동은 아닌데요. 당신을 받아들이고, 초대하고 기다릴 수 있도록 성장시켜 달라는 기도가 필요할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