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6주일. 사도 15,1-29; 묵시 21,10-23; 요한 14,23-29
예비자나 그렇게 열심치 않는 신자 사이에서 이런 말씀을 할 때가 있습니다. ‘착하게만 살면 되지, 꼭 교회를 다녀야 하나? 그럼 밀림에 사는 원주민 같은 경우는 교회에 나가지도 않는데, 그들은 다 지옥 가는거야?’ 충분히 나올 법한 질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습니다. 그들 모두가 지옥을 가진 않을 겁니다. 교회나 하느님,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그들 잘못은 아니니까요. 우린 모르지만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식으로 그들은 구원될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에게 관계된 일입니다. 착하게만 산다고 구원받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대도시에 살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와 계기는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내가 주님을 거부했다면 그 결정에 따른 책임은 당사자인 내가 져야 하는데요. 우리가 밀림에 사는 건 아니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내 생각이 당장에는 그럴 듯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겁니다.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의견이 나오면 나의 의견을 접어야 할 때가 있는데요. 그런 때가 온다면 그걸 접으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우리가 하는 기도가 그런 모양새를 띱니다. 어릴 때는 내가 원한 것을 바랬습니다. 소원이 이뤄지길 바랬고요. 현실의 편안함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지나며 달라집니다. 그런 편안함은 나를 진정 행복하게 해줄 수 없고요. 단지 ‘지금 당장’ 의 행복만을 원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좀 더 실질적이고도 근본적인 무언가를 바란다면, 여전히 흔들리는 나를 잘 붙잡을 수 있을텐데요. 여러분도 그걸 바라시는지요? 여기서 이런 말씀이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예전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찾는 게 무엇이요?” 스승이 손님에게 묻습니다. “평화입니다.”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이에게 참 평화란 그저 번민으로 다가올 뿐이지요” 어떤 수도회 단체가 와서 축복을 청합니다. 이에 스승은 익살맞게 씽끗하며 말합니다. “하느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을 흔들어 놓기를...”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당연히 우린 평화를 바라지요. 별일이 안 생기며 아무 탈이 없는 것이 행복이요, 평화일까요? 많은 이들이 그걸 바라면서 성당에 오지만 그분들은 참 사실을 모릅니다. 자신이 뒤흔들릴 때에야,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아파해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을요. 아무 탈 없길 바란다는 뜻이 실제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길 바란다는 뜻임을 아실까요? 자기 자신에게 속으면서 사는 것이 행복이요, 평화라 여기면서요. 진실을 묻어버리며 사는 그 누구들을 부러워하지 않길 빌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