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5주간 수요일. 사도 15,1-6; 요한 15,1-8
지금이야 너무 당연한 말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요.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것들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당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했고요. 그런 과정에서 얻어진 것은 당연히 소중할 수 밖에 없는데요. 오늘은 5,18 민주화 운동 기념일입니다. 당시 사건이 벌어진 80년에는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었고, 뉴스 보도가 나가는 것도 금지했기에 억측과 소문이 난무했지만, 40여 년이 흐르며 그 시절의 참상이 영상으로, 피해 증언자들의 증언으로, 이제 영화 등으로 옮겨지면서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아픈 날이었음을, 그리고 지금의 민주주의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데요. 하지만 어디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만 있었을까요?
오늘 독서 말씀도 그런 이야기입니다. 천주교,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를 제외하고도 하느님을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입니다. 유대교는 자기네 조상 아브람이 하느님을 통해 약속의 땅을 얻었다는 선민사상을 가지며 오늘도 구세주를 기다립니다. 이슬람교는 아브람이 아내 사라의 여종과 낳은 자식인 이스마엘을 통해 이사악과 배다른 형제가 공동체에서 나오면서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는 무하마드를 통해 세워진 종교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은 믿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 부분을 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이 예수님의 수난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를 들며, 그들은 그 부분을 애써 외면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데에 많은 혼란과 곤란함이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이 지금에서는 틀린 발언이지만 이들 당시 시대에는 당연스레 나왔을 법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배운 문화에는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 하느님 나라가 생소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을 피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오늘 복음처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내 방식의 믿음, 내가 이해한 정도의 믿음에서 벗어나서 여기서 과연 무엇을 강조하는 지를 봐야 하는데요. 자기 방식의 해석으로만 보려들면 오해를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 7-80년 경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모두들 자기 방식대로 나라를 걱정하고 민주주의를 해석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면서 주장하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 많지는 않은 것이 현실이기도 한데요. 무엇을 주장하고 싶다면, 먼저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 지부터 살펴야겠습니다. 이 세상을 오해하면서 살 순 없잖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