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사도 5,12-16; 묵시 1,9-19; 요한 20,19-31
우린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았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질 못하는 것을 봅니다. 세례는 받았지만 여기서의 가르침을 믿질 못하는, 그래서 본인의 삶이 여전히 망설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무얼 망설이느냐고요? 자신의 생각과 여기서의 가르침과 합치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뭔가 못미덥다고 여기는 것인데요.
종교(宗敎)라는 단어를 보겠습니다. 한자어는 근본 종, 가르칠 교입니다. 근본을 가르친다는 것이구요. 라틴어로는 religio. 이 단어는 re. 다시, legere. 읽다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인의 생각을 맞장구 쳐주는 곳이 종교가 아니라, 근본을 가르치고요. 다시 읽는다는 말은, 그동안의 배운 가르침의 행간을 따지며, 본인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것을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앙으로 사는 삶과 불신앙으로 사는 삶의 주된 차이가 생깁니다. 신앙으로 사는 삶은 대화로 여기지만, 불신앙은 삶을 독백으로 여깁니다. 본인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토마의 태도를요. 제자들이 주님을 다시 만났다는 얘기에 “나는 내 손을 그분의 못자국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자신만 진지하게 여기고, 자아실현의 집착적인 모습을 띌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른 이들의 체험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이른바 독백이지요. 이런 자세는 타인에게 귀를 기울이거나 이해하지 않고요. 이미 속단의 삶을 삽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잘못할 수도, 실수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이른바 자신에게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을 지키려고, 본인이 만든 갑옷에 들어가버린 자세는 일상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된 자세입니다. 그게 자신을 지킨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실제를 호도하는 자세인데요. 실제를 안보고서 자기 눈만 가리운다고 일이 해결될까요?
다행히 토마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왔지만 우린 어떻습니까? 많이 배웠다고 여기면서 자신의 틀에 갇혀살길 원한다면, 이는 대화적 자세가 아닌, 여전히 자기 말을 읊조리는 것만 듣는 독백의 삶인데요. 나는 열려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