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4주간 금요일. 지혜 2,1-22; 요한 7,1-30
몇년 전, 서울에서 경남 남해로 이사간 자매님이 얘기합니다. ‘여기 텃세가 장난이 아니다’ 고요. 그나마 50대 중반의 나이면, 그 동네에도 젊은 축이라 사목회 일을 시키는데요. 나름 서울에서 유수의 회사직책을 맡은 그였지만 성당의 중요 보직은 결국 자기네들의 몫으로 돌리며, 내주려 하지 않는 모습을 들려줍니다. 그 말을 들으며 성경의 내용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아는 예언자, 예수님의 처지가 그러했었다는 사실을요. 그럼 왜 이들은 핍박을 했을까요? 본인이 못났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를 감추려 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뜨내기, 이방인들을 소외시킵니다. 자기를 살리기위해 말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감추려 하고, 그 부족함을 상대에 대한 질책과 편견, 무시로 공격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야만 기존의 자신의 자리를 뺏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서의 악인들이라 표현된 이들, 복음의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을까요? 자기들이 못났다는 사실,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제일 쉬운 방법이 바로 무시와 따돌림이지요. 헌데 우리라고 이런 모습이 없을까요? 이미 동네에서, 회사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예전 토미즘을 연구한 어떤 신부님이 말합니다. ‘살면서 천재나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하느님의 업적을 만나는 소중한 체험이다’ 허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그들을 그만큼 칭찬합니까? 그보다 폄하하고 까내리는 현실을 보면서 우린 반성합니다. 살면서 나보다 잘나고, 멋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행운입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의 세상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괜히 좁은 생각에 갇혀 지내진 말아야 합니다. 우린 결국 하느님의 업적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