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6주일

2022. 2. 12. 오후 9:16:48

글자

연중 6주일. 예레 17,5-8; 1고린 15,12-20; 루카 6,17-26

 옛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는 말이 있습니다. 험한 꼴을 당해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뜻으로 쓰이지요. 저도 예전 중환자실에서 며칠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의식을 잃고 계단에 굴러서 머리에 피가 고이는 상황이 발생되면서 다행히 두개골을 열지 않고 쾌차할 수 있었는데요. 퇴원을 하고보니 앞서 인용한 말의 뜻을 이해하긴 했습니다만, 한편으로 산다는 게 무엇일까?’ 라는 질문도 던져졌습니다. 혹시 여기서 말하는 살아있음이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갈증의 해갈을 바라는 것이라면, 과연 난 그 만족추구를 살아있으면서 다 누릴 수 있을까요? 채워질 만하면 또다시 생기는, 만족이란 걸 모르는 추구를 경험하면서 오히려 마음이 황폐해지고 있음을 느꼈었는데요. 그렇습니다. 우린 욕심을 버리고, 욕심을 내려놓으려고 하느님을 찾았고요. 잠시 방황했다가 그분께 돌아오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나도 몰래 슬그머니 예전 버릇을 못 버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곤 합니다. 왠지 남에게 추월당하고 있다는, 뒤쳐진다는 느낌이 들어서였을까요?

 사람이 종교를 왜 찾을까요? 절대자를 왜 필요로 할까요? 자신의 세속성, 그 안에 물들고 찌들어 있는 자기의 상태를 봤기 때문입니다. 이 굴레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고요. 좀 더 가치있고 변치않는 영원불멸한 그 무언가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세상에서 잘나가는 듯 보이는 내가 아는 이들에 대한 시기심과 부러움에 휩싸여, 나는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꼴을 보곤 했는데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여긴 계속 참된 행복이 무언지를 알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말해왔습니다. 종말신앙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땠습니까? 교리를 통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어도, 정작 나는 현실의 안락함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가 지금 살고있는 여기 현실의 한계를 깨우치게 해주었는데도요. 사람들의 관심의 쏠림현상이 허상이었고, 잠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마치 가랑이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뭔지 알면서도 나는 두 개를 다 가질 수 있다는 착각을 했는데요. 행복을 바라십니까? 내가 착시 현상을 일으킨 건 아닌지, 교회가 설립된 이유를 오해한 것은 아닌 지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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