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1주간 금요일
우리가 교리를 배우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해야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차원을 넘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차원높음, 아이러니나 역설같은 것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한편으로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어쩌면 하느님이 원하신 방향대로 흐르는 것은 아닐까? 여깁니다. 아등바등 뭔가 하지만 결국 허락된 생명의 틀 안에서 뭔가 하는 것들일 뿐인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벌이는 욕심도 그분이 보는 시각에서 볼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지 이미 아셨을지 모릅니다. 쉽게 말해서 동물의 약육강식에 의한 자연법칙을 보면 최상위 포식자인 사자가 누우 같은 커다란 초식동물을 사냥합니다. 배고프니 벌어진 당연한 사냥입니다. 여기에 실컷 배부른 사자가 떠나면 하이에나나 독수리가 와서 나머지를 먹고요. 그다음 고슴도치 비슷한 호저가 뼈를 갉아 먹고요. 그다음 개미 등 작은 벌레가 오고 나머지는 더 작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됩니다. 처음엔 배고픈 사자의 사냥으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생태계의 자연순환으로 이어지고 결국 각 개체수의 자리를 잡으며 다들 먹고 살 수 있게 됩니다.
복음의 약은 청지기는 자신이 살기위해 문서를 조작합니다. 허나 그 행위로 빚진 사람을 살리고, 주인은 일이 정리된 듯 여깁니다. 협소하게 보면 범죄행위지만 크게 보면 서로를 살리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에 신자들이 각자 가진 것을 바치고 필요한 만큼 타다쓰는 공동소유의 삶이었습니다. 이상적인 삶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물론 소유욕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집착하게 하지만 기본적인 소유는 사람의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시킵니다. 물론 순수함은 중요합니다. 올바른 정의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사랑은 딱 그만큼이 아니라 물이 흘러넘치는 바가지의 모습도 있습니다. 마치 우물가 근처에는 물을 많이 먹은 이끼나 식물이 자라곤 하듯이 흘러넘치는 속에 모두가 공생하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헤아리곤 합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나쁜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끌어내시지요. 마치 유다가 자기를 살리려고 예수님을 팔아넘겼지만 오히려 예수님의 구원방식을 돕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던 것처럼요. 어찌보면 우린 하느님을 피하려 하고, 도망가려 하면 할수록 당신께 예속된 삶을 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차원을 넘는 것을 만나면 만날수록 겸손해지는 요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