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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갖고 있는 시기심이나 질투를 어떻게 관리하십니까? 다들 갖고있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요. 우리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슷한 수준의 사람과 그런 감정이 더 벌어지고요. 게다가 나보다 못했던 사람이 갑자기 형편이 나아지거나 하면 그걸 우린 못견뎌합니다. 갑자기 나와 비슷해지거나 상황이 역전되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모르는 사람보다 오히려 비슷한 동네 사람끼리 더 흉을 보는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이유를 이러한 시기심이나 질투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인데요. 사실 예수님은 신분이 귀족이 아닌 평민이고요. 율법학자가 아닌 방랑설교가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뛰어난 가르침을 펴고, 기적을 일으켜 아픈 사람도 고치시니 인기가 올라갑니다. 자기네 기득권층보다 말이지요. 이게 그들을 미치게 만든 겁니다. 자기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이 자기보다 뛰어나니 어이가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사람을 도와줄 힘이 있어도 그걸 남들에게 나눠주지도 않으면서요. 예전 조선시대 때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려고 했을 때 왜 신하들이 반대했을까요? 이미 한자라는 좋은 문자가 있어서요? 아니죠. '일반인들이 문맹자 없이 모든 글을 읽는다?' 이게 자기의 신분을 위협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그들은 도움을 주지도 않으면서 일단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독서의 바오로가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는 뜻은 이미 구약의 예언을 통해 구세주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나올 것이란 말을 들었어도, 정작 예언이 이뤄졌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나보다 평범하고 출신성분이 못한 사람이 구세주 메시아다?’ 말도 안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려 하시자, 바리사이들은 율법 뒤에 숨어서 예수님만 노려봅니다. 규정을 어기면 언제든지 치도곤 낼 것을 기다리는 맹수처럼요. 그 모습에 답답하셔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게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까지 합니다. 정의는 큰 시스템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만, 개인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규칙을 넘어서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이 아프고 부당하니까요. 나의 시기심에 가로막혀서 개인의 차이를 보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사랑하지 못하는 사태를 맞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린 사람을 살려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