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말라 3,13-20; 루카 11,5-13
우리가 잘 아는 성모님은 주님의 뜻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물론 당신도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깨닫진 못하셨습니다. 어린 예수님이 자라면서, 옆에서 지켜보면서 차츰차츰 알아차리셨지요. 하느님의 방식을 다 알아듣진 못하셨지만 그럼에도 ‘믿음과 신뢰’ 라는 바탕이 있었기에 주님과 합한 삶을 사셨는데요. 우리도 그렇지요. 솔직히 말해서 교회가 하는 방식을 다 알아듣진 못합니다. 교회가 시키니까, 그렇게 해야한다니까, 그냥 무작정 따라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얼마 전에도 그랬습니다. 결혼을 하려는 예비부부들이 왔습니다. 물어봤지요. ‘왜 여러분께 혼인교리를 받으라고 하고, 오늘처럼 혼인관계증명서를 가져와서 교회법에 근거한 행정적인 면담을 하는지 아시느냐?’ 고요. 그럼 대다수의 답변이 이렇습니다. ‘성가정을 꾸미려면 이렇게 해야한다는 걸로 안다’ 고요. 막연한 답변이지요. 시키니까 해야 하는 수준이라면 이런 절차는 대단히 형식적이고도 답답한 절차일 것입니다. 하지만 답은 이거지요. ‘결혼은 누가 만들었나요? 저도 모릅니다. 마치 동,식물처럼 자연스레 시작되었지요. 임금이나 대통령이 만든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역사의 시대를 살면서 잘못된 결혼방식이 생겨났습니다. 일부다처제, 정략결혼, 보쌈 등 납치에 의한 결혼, 미성년자와의 결혼, 그리고 태어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지 않고 유기하며 버리는 일까지, 수많은 잘못된 혼인과 가정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원래 교회법은 교회의 설립과 지속을 잘 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유독 평신도에게 혼인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가정이 제대로 살아야 사회가 살고, 결국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을 미리 살 수 있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여기 있는 모두가 하느님의 방식, 교회 방식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민감한 문제인 낙태, 환경, 에너지, 노동문제, 인권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교회를 불편한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본인도 가난하면서 오히려 극소수의 부자, 재벌들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본인도 노동자면서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오히려 혐오하고 배척하는데요. 왜 그럴까요? 독서에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마치 “나는 불을 지르러 왔다. 칼을 주러왔다.” 처럼 불편한 메시지이지만 그동안 교회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주님이 말씀한 바른 삶을 살기위해서입니다. 정의로움과 사랑스러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복음에 누군가 문을 두드립니다. 본인이 이득을 얻고자가 아닙니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돕고자 손길을 내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10월 말이면 새로운 단체장을 뽑아야 합니다. 오래된 본당일수록 한 사람이 단체장을 오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잘하니까’ 라는 말 안에는 ‘나는 하고 싶지 않다’ 가 들어있지요. 같이 사는 세상에 공생(共生)하기 위한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남에게 짐을 지우기보다, 같이 짐을 지는 성모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