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1주일.

2021. 10. 30. 오후 5: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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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31주일. 신명 6,2-6; 히브 7,23-28; 마르 12,28-34

 여러분은 자유롭게 이 성당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정말 자유로우려면 성당에 오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같은 일요일에 늘어지게 잠을 자는 게 더 나을테니까요. 여러분은 참된 자유를 얻고자 신앙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정말 자유를 원한다면 신앙을 갖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여기서 가르쳐주는 가르침과 계명들이 여러분의 생각과 부합되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항상 같을 수 없으니까요. 이제 슬슬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기 위하여 여기 오셨습니까? 자유를 억압받기 위해 오셨습니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의하면 자유는 3가지 주제로 나뉜답니다. 첫째가 생각과 토론의 자유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표현을 펼칠 수 있어야 하겠지요. 둘째로 개별성의 자유입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자유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예외가 있는데요.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옮길 때는 일정한 한계가 필요합니다. 행동의 자유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고찰입니다. 모든 개인의 자유는 인정하되,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 책은 1859년에 나왔습니다. 1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의 논리는 적용됩니다. 철학자 사르트르도 말합니다. ‘자유에는 역설이 존재한다고요. 하늘의 구름, 꽃이나 나무 등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신 내부에 갖고 있기에 그 자체로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기 안에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빈 속을 채우려면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고 그 다른 것 없이는 자신도 존재할 수 없기에 자유를 얻으려면 그만큼의 구속력이 있어야 한다는 역설인데요. 그러면서 나중에 알게 되지요. 구속되는 듯한 부자유스러움과 자유의 한계가,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굴레가 아니었음을 말이지요.

 길게 말씀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느님께 자유를 얻으며 태어났습니다. 처음부터 계명이 있던 것도 아닙니다. 창세기의 아담이 들은 것처럼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먹지 말아라.” 는 말만 들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가능하다는 것이죠. 허나 사람은 본성상 금기(禁忌)를 넘고 싶어하고 결국 넘습니다. 그러면서 계명이 나오고, 온갖 율법이 생기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법과 규칙이 생겨납니다. 가장 간단한 것을 어긴 인간의 자유가, 더 많은 숨을 막아버리는 법으로 옭아메고, 이젠 법대로 하자 며 소송을 불사하고, 끝내 가정은 파탄나기에 이릅니다. 여기에 누가 승리자일까요?

 감염과 전염의 시대를 사는 때입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게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남을 감염시키고요. 본인도 고생합니다. 모든 이가 자유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자유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때를 살면서, 여러분이 들으신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의 참된 정신을 다시금 헤아렸으면 합니다. 우린 참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가진 자유를 절제하며 자신을 이겨나갈 때에야 참 사랑을 만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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