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르타, 성 마리아, 성 라자로 기념일. 1요한 4,7-16; 요한11,19-27
우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제대로, 오류가 없이, 자세하게’ 말이다.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저 겸손해서가 아니라 막연하게 알면서 다 아는 듯이 해왔던 것은 아닐까?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삼남매 집에 가십니다. 오빠인 라자로의 죽음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라는 말씀에 마르타는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대답은 그럴 듯하게 맞는 대답 같지만, 실제로는 마르타가 아직은 예수님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답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지금도 그것이 가능한데, 나중에야, 부활의 때가 되어서야만 가능하다고 여긴 건데요. 그저 자기 나름대로 얼추 정리한 대답을 하고 만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럴 때가 많지요.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서는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실로 어느 정도인지 체험하지 못한 것이 많기에, 그저 이론적으로, 교리서에 나온 데로만 대답을 하려 듭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전부인 양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정리된 답변만 하게 되면 성령의 움직임, 은총의 차원을 내가 아는 수준으로만 격하시키면서 그야말로 ‘죽은 교리’ 되고 맙니다. 인간적으로 대답은 잘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지식 정보적 차원으로 이해하고 끝낸 건데요. 그건 믿음의 차원이 아니지요. 깔끔하게 정리만 해놓은 것일 뿐, 역동성이나 자유로운 그분의 활동은 없는 어디 메여서 갇힌 듯한 차원인데요. 여기에 주님은 라자로를 깨우며 그 힘을 보여주시지요.
우리도 살면서 그런 것을 만나야 합니다. 자기가 배운 것이 전부인양, 자기 생각이 옳기만 한 것처럼 여기게 되면, 다른 차원의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자기 자신에게 갇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주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까요? 당연히 낮고 겸손한 자세가 나와야 하겠지요? 나는 아직 그분을 다 헤아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만나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