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0주간 목요일. 2고린 3,15-4.6; 마태 5,20-26
어떤 성당을 새롭게 가려는 신자들끼리 묻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 계신 신부님은 강론이 좋으셔?’ 대다수 분들이 강론을 잘하는 신부님을 만나길 희망합니다. 물론 듣기에 좋을 것이고요. 들으면서 어느새 자기 수준도 올라가길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만나야 하는 현실은 좀 다릅니다. 강론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돋보이거나 두드러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뛰어나려고 하다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 모습은 결국 신부님들은 교만의 자세로 빠지고요. 신자들은 하느님이 없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빠질 수 있는데요.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우리가 부르짖는 말과 내용에서 나는 단지 전달자의 역할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신부의 개인적인 의견을 이 강론대에서 말하다가는 당장 퇴출되어도 할 말은 없습니다. 이 자리는, 이 위치는 그런 곳이 아니지요. 이런 문제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이미 세례를 통해 ‘저 사람은 천주교인’ 이라는 안 보이는 낙인이 찍혀있습니다. 그것을 인호(印號)라고 하지요. 그렇게 잘 살면 좋으련만 비신자들이나 이웃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사람이 왜 그래?’ 사실 듣기에 불편한 말입니다. 좋은 말만 듣고 살고 싶겠지만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항상 칭찬의 말만 듣진 못하지요. 하지만 ‘믿는다는 사람이 왜 그래?’ 라는 말에는 이런 것이 깔려있지요. ‘비록 자신들이 열심히 살지는 못하더라도 신자인 우리는 뭔가 남들과 다르길 바라는 마음’ 을 말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지요. 개인적인 욕심과 고집, 자존심을 지키려는 틀어진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려세우려 한다면 우린 화답송의 구절처럼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 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텐데요.
복음의 예수님이 말씀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는 말씀에서 우리가 결국 어떤 실천의 행동이 나아야 하는 지 봐야 하는데요. 당장에, 한 번에 되지는 않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꾸준한 사랑의 힘이 나오도록 기도하며 실천해나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