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많은 신부님들께서 오늘만큼은 “믿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로 일관하는 강론이 있습니다. 많은 수의 신부님들이 여러 비유로 말씀은 하시지만 그 비유란 것이 뭔가 부족하게 여겨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날은 바로,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과연 얼마나 설명하기 어렵기에, 얼마나 알아듣기 힘들기에, 설명을 해도 알아듣기 어렵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설명할 수 밖에 없을까요? 우선 그 배경이 될 수 있는 말씀을 하나 꺼내면서 강론을 해볼까 합니다.
요한 1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십니다.” 하느님이란 뜻을, 인간의 작은 머리로 다 헤아릴 수 있고,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부터가 겸손하지 못한 것임을 알아차린다면, 우린 이것에 대해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는데요. 여기서 위(位)라는 개념을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위(位)는 라틴어로 persona, 나중에 이것이 영어의 person이란 단어의 어원이 됩니다. 위의 개념은 ‘지능을 가진 완전한 개체의 최고 자주성’ 입니다. 좀 잘라서 설명하면 ‘지능을 가진’ 은 동,식물과 달리 이성을 가졌기에 무엇이 문제인지 알면서 책임을 진다는 뜻이고요. ‘완전한 개체’ 란 사람의 손이나 발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뇌가 시켜서 하는 거라면 손,발은 자주성이 없지요. 그런 건 위가 아닙니다. ‘최고’ 란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었다는 것이구요. ‘자주성’ 이란, 한 개체의 완전한 주권의 소재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즉 위는 외부의 어떤 영향도 의존 받지 않고 자립하여 존재하는 실체를 말합니다. 그럼 사람을 ‘위’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사람은 시,공간과 환경, 다른 이들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가 과연 뭐길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말씀인지 잠시 일문일답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첫째. 삼위 중에서 서열이나 등급순으로 성부, 성자 성령이니까.. 성부가 제일 높지 않냐고요. 하지만 세 위격은 어떤 우열이나 등급이 아닌 고유하고 독립적인 본성을 이루기에 세 위격은 동일한 능력을 지닙니다. 구분할 수 있다면 다만 ‘관계’로 구별되어 성부 성자 성령이 될 뿐, 이 호칭 순서가 우열적 등급이 아닌 ‘사랑의 관계’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전 교리 선생님들은 삼위일체를 가르친다고, 삼각자나 세 잎 클로버를 예로 들던데 그래도 되나요? 라 묻는다면 안타깝지만 이는 잘못된 설명이라 하겠습니다. 세 위격은 신적 본성과 실체를 지니되, 관계를 통해서만 실제적으로 구별됩니다. 그런데 클로버를 가지고 예를 든다면, 마치 전체 중에서 어느 일정한 부분만 구성된 것처럼 여겨지기에 완전하지 못한 착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러면 어떨까요? 한 남자가 아빠, 남편, 아들이라는 역할의 다양성 처럼 이해하면 어떨까? 라고요. 그런데 세 위격을, 단지 한 분이신 하느님의 세 가지 역할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한 인물이 역할에 따라 다른 호칭으로 불리겠다는 말인데요. 위격이란 단순히 역할이나 외적인 모습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인격적 주체의 현존성을 의미하는 용어이기에 맞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그럼 물이 온도변화에 따라서 수증기나 얼음이 되지만 물이라는 본래 성질은 변함이 없듯이, 하느님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각기 나타나시면 되지 않나요? 하고요. 그런데 이는 신학적인 오류를 가집니다. 이미 2-3세기에 양태론이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양태론은 한 분 하느님이, 단지 외적인 양태나 양상만 바꾸어서 예수님처럼 내려와 이 세상에서 활동하셨다는 이단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십자가에서 수난 받은 분은 인간이신 당신의 외아들 성자 예수님이 아니라, 실은 성부 하느님이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를 바꿔 말해 ‘성부 수난설’ 이라고 하는데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하느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는 주장이죠. 이 양태설은 마치 컴퓨터의 절전모드나 선풍기 수면모드처럼, 삼위의 세 위격이 하느님의 필요한 사항에 따라 그 외적인 양식만을 바꾸어 현현하신다는 주장이었는데요. 이는 잘못된 이론입니다. 오히려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위격이라 하겠습니다. 자~ 이쯤되면 이런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라고 이해해야 합니까?’ 안타깝게도 이렇게 설명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하느님의 마음은 우리보다 크시기에 완벽하게 딱 떨어지는 예시나 비유를 찾기란 힘듭니다.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고요. 권한을 주신 하느님에게서 모든 것이 나오기에 복음전파가 가능하다는 말씀인데요. 하느님은 우리보다 크시기에,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시기에, 그 흔적을 유비적으로 유추하여 알아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쓰는 언어로 설명 가능한 부분보다 오히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것을 받아들이신다면, 관계 안에서의 삼위가 가진 참다운 사랑을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데요.
여러분은 나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떠하십니까? 이것부터 잘 정립되어야 우리보다 더 큰 삼위일체라는 신비도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