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학자 기념일. 사도 13,13-25; 요한 13,16-20
우리가 동양 사람이다 보니 이런 환상과 바람을 갖곤 합니다. ‘홀로 깨달아서 깨우침의 세계로 들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을 바랍니다. 얼핏 들을 때 멋있지 않습니까? 홀로 득도(得道)한 삶을 사니 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종교의 근원을 ‘계시종교’ 라 말합니다. 홀로 깨달아 얻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깨달았다는 것마저도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안배(按排)해주셨기에 가능함을 인정하는 것 말입니다. 즉 이 안에는 ‘잘난 나’ 는 없고 오히려 주님이 허락해주셨기에 가능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는 겸손함이 들어있는데요. 솔직히 사람이라면 ‘명예욕’ 이 있지요. 천하에 자신을 드러내고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인정하길 바라지요. 또는 그런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실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나중으로 치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이것도 가지고 싶다고, 얻고 싶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지요. 오히려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실 때, 가능함을 알게 되는데요.
오늘 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누군가 높아지고 싶다면, 먼저 낮아지는 연습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불교에도 행자(行者)가 있고요. 수도원, 신학교에도 기도 시간 외에 노동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면서 진정 낮아지는 삶이 무언지를 배우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지요. 거기 들어가기 전에 다들 귀한 자식이 되다보니, 노동을 시키면 당장 이런 말부터 나오곤 합니다. ‘그런 건 관리 아저씨나 시킬 것이지...’ 공부만 시켰기에, 자기만 귀한 줄 알게 된 것일까요? 요사이 아파트 주민과 택배 직원과의 문제를 보면서 그런 것을 봅니다. ‘다들 누군가 밑에 있는 사람들끼리 무슨 짓을 하는 것’ 인지 말이지요. 서로의 자리를 봐주기보다 남보다 높아지려는 안간힘을 보며 무엇이 보이십니까?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일치의 과정을 거칠 때,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내가 기꺼이 동참하고, 내가 하려는 일에 하느님도 도와주십니다. 그때부터는 누가 높냐? 가 중요한 게 아니지요. 마치 독서에 나온 바오로가, 그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꿰뚫는 설교를 하면서 유대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의 천재적인 능력도 있겠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난 체험에 그는 예전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한 가타리나 성녀도 그러했습니다. 평소의 기도의 삶을 통해 하느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체험을 통해 그녀는 완덕의 길로 들어섭니다.
우리 주변에도 천재적인 능력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부러워하거나 시기, 질투를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을 이렇게 바라봐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선물’ 이라고요. 그들을 통해 내가 만날 수 없었던 그 무언가를 실현해내고 있으니,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요. 천재성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면이 있으니 이것을 인정하면서 나만의 것도 찾을 수 있는데요. 여러분도 주님의 기운을 잘 받아서 여러분의 것으로 잘 정돈해가시길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