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9주간 수요일. 토빗 3,1-17; 마르 12,18-27
참으로 요지경 같은 세상입니다. 엄연히 사건의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는데 주위 사람들은 오히려 피해자를 찾아가서 가해자와 합의를 보라고 종용하고요. 가해자는 별 사과도 없이 어물쩍 넘어가려는 세태인데요. 게다가 그곳의 상관 책임자는 책임질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에게 2차, 3차의 또 다른 가해를 가하는데요. 이런 것을 방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확산되지 않으려 덮기에 급급한 사태를 말이죠.
눈이 멀게 된 토비트와 일곱 번이나 결혼하였지만 결국 그때마다 남편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던 사라 모두, 이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하지요. ‘뭔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겠지..’ 욥기에도 보면 욥을 위로하러 왔다는 친구들조차도 ‘하느님은 그러실 리가 없다.. 니가 뭔가 부족했다는 투’ 로 말을 합니다. 이런 시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속됩니다. 억울하고 피해입은 이들이 계속 생기는데도 이를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고 ‘나만 아니면 된다’ 는 태도가 결국 어떤 삶으로 이어지는지 아십니까? 세상을 현실주의자로 살게끔 만듭니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려야 하고, 내가 잘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불평과 어려움에는 관심없는 인간으로 변해갑니다. 당연히 주님이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 같은 것은 안중(眼中)에도 없게 되지요. 복음에 나왔던 사두가이들은 영생과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귀족층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잘 살고 있는데, 만족하는데다가 다른 이들의 아픔에는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비유를 들어도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라는 말을 늘어놓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나중은 잘 모르겠고, 지금만 잘 살면 된다’ 는 발상이 오늘날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의도도 관심이 없게 됩니다.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이란 뜻이 뭡니까?
옛말에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을 내신 하느님이신데 늙음과 병환으로 죽은 당신의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부모가 자녀를 가슴에 묻듯, 모든 자녀는 하느님 안에서 늘 살아있는데, 그것을 모르는 이들은 자기만 아는 괴물로 되어갑니다. 현재 우린 어떤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사랑을 더 배워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