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2마카 6,18-31; 요한 12,24-26
사도행전 3장에는 불구자인 사람 하나가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봅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베드로가 말하였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주님을 믿으면 얻고자 하는 것을 무상(無償)으로 받을 수 있는데, 어느 누가 이것을 마다하겠습니까? 솔직히 뭔가 바라는 기복신앙을 간사한 것처럼 부정적으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만, 사람인지라 일단 얻고픈 것이 사실입니다. 그 기본적인 욕구가 해갈되길 바라지요.
오늘 윤지충 바오로와 더불어 124위 복자를 위한 날입니다. 당시 유교의 나라에서 왜 주님을 모시려 했겠습니까? 유교를 통해 세워진 나라이건만, 실상 공맹, 주자사상이 뿌리를 잘 내린 것이 아니라, 붕당정치로 치닫으며 오늘날 계파의 대립처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은 관직 길이 막혔고요. 여기에 죽은 자식에게도 세금을 거두는 백성의 부담감에서 새로운 세상이 오길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들에게 유교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습니다. 우연히 중국에서 휩쓸려 서적 중 들어온 천주학은 처음에는 학문으로 받아들였지만 이것이 계급을 초월하는 만민평등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었는데요. 그렇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뭔가 얻기를 바랬습니다. 그저 내 주머니 그득하고, 배부르길 바란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기 위한 세상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요.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 복자 윤지충의 행동을 지금의 시각으로 안 좋게 바라볼 수는 있겠지만, 그 당시 이들에게 유교는 희망 없는 것으로 전락했고요. 다만 세상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기에, 박해는 감내해야 할 과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무언가를 바라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이 사람다운 세상을 꿈꾼 것인데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복음에 “밀알 하나가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었다”처럼 비록 그분들은 그 열매를 만나지 못했지만 이분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무혈입성하듯 주님을 만났으니 그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입니까? 이 감사함을 더 많은 이들에게 나눠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