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1주 금요일. 에제 18,21-28; 마태 5,20-26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 에는 주인공 햄릿의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나쁜 인간의 무례함, 돌덩어리, 창살을 인내하는 것이 영혼에 고귀한 일인가? 아니면 거대한 문제를 거슬러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 더 고귀한가?” 덴마크의 젊은 왕자는 이미 현대인이 겪는 내적분열 상태를 이해합니다. 즉 자기 실존을 바치는 투쟁을 해야할까? 아니면 세상의 흐름을 따를 것인가? 즉 “죽느냐 사느냐?” 고 고백하는 문제는 충만한 인간성의 실현을 위해 인간의 내밀한 본성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거절하려듭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매 순간 선택과 판단을 해야하고요. 이득을 넘어선 고귀함을 얻고자 몸부림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고 녹록치 않습니다. 사람 개개인이 올바로 살고자 하지만 매번 넘어지고, 휘둘리고, 후회를 반복하면서 악습의 굴레에 놓여 있습니다.
독서에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의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는 말씀은 자칫 두렵고 겁박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복음은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는 주님의 공평하심과 흔들리기 쉬운 내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다행스럽게도 교회에는 보화가 담긴 중세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을 통해 이런 문제에 대해 안내의 지침을 열어놓았기에 잠시 소개할까 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본인의 이성과 의지를 통해 선(善)함을 추구하고 기울어지는 것을 ‘자연법’ 이라 합니다. 여기에 더 상위개념이 있으니 ‘영원법’인데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사물 안에 일정한 목적을 새겨두신 법을 말합니다. 우리의 몸을 예로 들어보지요. 육체의 각 기관은 나름의 기능과 목적을 지닙니다. 심장은 펌프질하면서 새 피로 정화시키며 각 기관에 보내야 하고요. 폐는 이산화탄소를 산소로 교환시키며, 위장은 음식물을 소화시키고, 눈은 사물을 보게끔 합니다. 이외에도 수 많은 기관은 일정한 목적을 갖고 그 일을 수행하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도록 최종 목적을 둡니다. 우리가 아는 하느님도 목적을 갖고 계신데요. 인간의 본성이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창조의도에 맞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알아차리며 불필요한 불순물을 걷어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요. 하느님이 말씀한 의로움은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결국 ‘사람다움’이 무언지를 알아갈 때 우리는 그분과 합하는 삶이 되어갈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