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의 대축일. 묵시 7,2-14; 1요한 3,1-3; 마태 5,1-12
제가 이태원 성당에 있을 때 일입니다. 시간이 오후 5시경이었는데요. 찻길 인도 보도블록을 걷는데, 맞은편에서 외국인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헌데 입은 옷을 보아하니 신부님들이 입는 검은 양복에 끌러지 셔츠, 로만칼라를 입고 있었습니다. 인사를 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었기에 인사할 상황은 아니었고요. 속으로 ‘아~ 외국 신부님이구나’ 라고 여기던 중, 갑자기 그분이 건물 지하 계단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순간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클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아~오늘이 할로윈데이구나.’ 그 복장은 코스프레 복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간 중얼거렸습니다. ‘나도 저 옷 있는데..들어가도 모를텐데..’ 사람들은 할로윈데이가 미국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호박 걸어놓고 귀신복장을 한 아이들이 사탕이나 받으러 가고, 어른들은 흥청망청 노는 날로 여길지 모르지만 실은 우리 가톨릭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루의 시작이 아침부터 시작되는 우리와 달리, 유대인 전통은 하루의 시작이 저녁부터 시작됩니다. 즉 ‘모든 성인의 대축일’ 의 시작은 어제 할로윈데이라고 부르는 저녁부터 시작되었구요. 기원은 8세기경부터 모든 성인들을 위한 기념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상술로 인해 변질된 것만 보았기에, 원래 생긴 취지의 정신은 못 본 것이지요. 오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성인들을 위한 날이고요. 이 기간은 내일 위령의 날을 비롯하여 일주일간 이어집니다. 다 죽을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오늘 1독서에서 천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하느님으로부터 인장이 찍힌 인호를 받은 우리는, 그야말로 희고 긴 겉옷을 입었다는 표현대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끗한 인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인물들이 ‘구원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하느님께 모든 것이 종속되어 있음을 기뻐합니다. 2독서는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분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순결한 것 같이 우리도 순결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복음에서는 “행복하여라” 라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시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라며 지금의 어려움과 고통은, 당신으로 인하여 깨끗이 희석되고 진정한 보화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그 보화를 진정 얻고 싶으신가요?
여기서 여러분께 문제 하나를 낼까 합니다. 가톨릭 굿뉴스를 찾아보면 성인의 이름과 축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입니다. “현재 가톨릭 교회에 등록된 성인의 숫자는 전 세계 합쳐서 6339명입니다. 그런데 이 숫자가 많을까요? 적을까요? 힌트는 교회 역사상 2천년 동안 말입니다.” 작년 가톨릭 교회가 연감을 발표했는데요. 가톨릭 인구는 2017년 현재, 13억이 넘어서 세계 인구의 17.7%를 차지한답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이들이 있는 100년간 13억의 신자수를 갖고있다지만, 그에 반해 2천년간 6339명은 실로 너무 작은 숫자인데요. 우리는 성인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혹시 예전에 성인전을 읽어보셨습니까? 그 성인들의 모습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어찌보면 답답하게 여겨지셨을 것이구요. 현실의 걱정과는 상관없이 사는 사람 같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찬찬히 잘 살펴보면 주어진 현실과 철저하게 싸우면서 버텼던 인물들입니다. 그럼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치밀한 계획에서? 아니면 든든한 재력에서? 아니면 가진 능력에서? 아닙니다. 바로 모든 구원의 근원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그들은 힘든 와중에서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현실의 유혹과 동료들의 반대 속에서도 기도를 통해 주신 당신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기에, 그 당시엔 말도 안되는 것이라 여겼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그것이야말로 참 주님의 뜻이었구나’ 라고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 성인의 이름도 생기고, 우리의 부주의로 그 업적이 퇴색된 분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당신께 걸었던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도 같은 인호를 받고, 그들의 이름을 내 것처럼 사용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들의 얻었던 기쁨, 그들이 누렸던 즐거움을 이제 우리 자신 또한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묵상하시겠습니다.
